원식준
元植俊1862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1)
관련 사건
- · 구성군 남시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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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1) 평안북도 구성군(龜城郡) 서산면(西山面) 신덕동(新德洞) 출신이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58세로 1862년생으로 추정된다.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구성군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구성군에서는 1919년 3월 7일 최예락(崔禮洛)이 주위 인물인 최성진(崔成珍)·양인항(梁仁恒) 등과 의기투합하여 계획한 것이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최예락은 서울에서 시위 군중에 나눠 줄 독립선언서와 주의서를 각각 500장 씩 교부받았으며, 태극기와 독립기의 문양 또한 전수받았다. 이를 가지고 최성진·양인항 등과 남시(南市) 시장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시위 당일 남시 시장 한가운데 태극기를 높이 걸고 시위 군중을 모집하였다. 1,000여 명의 군중이 이에 호응하여, 독립기를 손에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다가 출동한 헌병대에 의해 주요 인물이 붙잡혔다. 3월 11일에는 400여 명의 군중이 남시에서 만세시위를 벌이며 헌병주재소로 행진하였는데,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출동한 헌병대가 시위군중에 발포하였으며 시위를 주도한 15명을 붙잡았다. 3월 30일 시위는 읍내에서 일어났는데,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한 3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오전과 오후 2차례에 나누어 읍내 성안으로 진격하여 들어갔다. 그러나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헌병대가 출동하였고, 양 측이 충돌하여 사상자가 다수 발생하게 되었다. 3월 31일 시위는 남시에서 가장 크게 일어났다. 남시 장날을 기회로 하여 약 5,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대규모의 시위대가 조직되었으며, 이들 시위 군중이 헌병주재소를 포위하였다.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출동한 헌병대와 대치 상태에 이르러, 헌병대가 시위대에 발포하여 7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되었고, 시위대 중 5명이 붙잡혔다. 또한 사기면(沙器面) 신시(新市)에서도 3월 31일과 4월 1일에 걸쳐 대규모의 시위가 발생하였는데 31일에는 1,000여 명, 4월 1일에는 1,500여 명에 달하는 군중이 모여 격렬하게 시위를 벌이고 일본 경찰과 충돌하여 사상자와 체포자가 다수 발생하였다. 4월 1일에는 신시 외에 남시와 읍내에서도 계속하여 시위가 발생하는 등, 구성군 전역에서 시위가 다발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구성군에서 벌어진 일련의 시위 중 남시에서 진행된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붙잡힌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까지 남아있는 재판 기록을 토대로 확인해 본 결과 시위에 참여한 일자 및 시위 장소가 확실하지 않다. 체포 이후 재판 과정에서 항변하기를, “본래 한국인으로 합병 이후 매일 자유 독립을 원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힘을 얻지 못하였으나, 천운이 바뀌어 파리강화회의 및 민족자결에 대한 내용을 접하게 되어 국민의 의무로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만세를 불렀다”고 하였다. 이러한 행동이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은 것은 억울하며, 이에 제1심과 제2심에서의 판결에 불복하여 고등법원에까지 항소하였다. 그러나 고등법원에서 상고를 기각하여,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윤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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