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현덕
禹顯德1897. 4. 20 ~ 1978. 4. 2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4)
관련 사건
- · 청양군 정산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04) 1897년 4월 20일 충청남도 청양군(靑陽郡) 정산면(定山面) 광생리(光生里)에서 태어났다. 한자가 다른 현덕(鉉德)이라는 이명이 있다. 향리에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4월 정산면 정산시장 만세시위와 권흥규 운구행렬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정산면에서는 홍범섭(洪梵燮)을 중심으로 임의재(任毅宰)·윤석희(尹錫禧)·홍세표(洪世杓)·박상종(朴商鍾) 등 백곡리(白谷里)의 유림들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만세운동은 1919년 4월 5일 정산시장에서 시작되어 정산향교(定山鄕校) 직원(直員) 권흥규(權興圭)의 사망을 계기로 다음날인 4월 6일 목면(木面)으로 확대되었다. 홍범섭 등은 면사무소 소재지인 서정리(西亭里) 정산시장의 장날인 4월 5일 오후 3시부터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이들은 시장에 나온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배포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만세운동을 전개했으나, 곧바로 출동한 일제 헌병에 의해 청양헌병분견소로 강제 연행되었다. 홍범섭 등이 일제 헌병에 강압적으로 연행되는 모습을 보고 분노하여 주변의 다른 주민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연행된 홍범섭 등 주도자들을 대신하여 권흥규가 700여 명으로 확대된 시위대를 이끌었다. 그의 지휘에 따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헌병분견소로 달려가서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 헌병들은 연행자의 석방을 거부하고 만세시위의 즉시 해산을 명령할 뿐이었다. 권흥규는 시위대의 선두에서 붙잡힌 주도자들을 당장 석방하라고 더욱 강력하게 요구하다가 일제 헌병의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이와 같은 예상하지 못한 참극에 이날의 만세시위는 흩어졌다. 정산시장의 만세시위는 권흥규의 시신 운구를 계기로 다음날 목면으로 이어졌다. 4월 6일 아침 시신 운구를 위해 권흥규의 친인척을 비롯하여 전날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헌병분견소 앞으로 모였다. 이들과 함께 대규모의 운구행렬을 조직하여 그 선두에는 ‘배일사권공지구(排日士權公之柩)’라는 명정(銘旌)을 세웠다. 목면 안심리(安心里)로 가는 운구행렬에 동참하였다. 권흥규의 순국 소식을 전해들은 주민들이 안심리로 가는 과정에서 통곡 속에 계속 합류하여 행렬의 규모는 1,000여 명으로 확대되었다. 운구가 지곡리(池谷里)를 지나갈 즈음부터 통곡소리는 점차 ‘대한독립만세’의 구호로 바뀌기 시작하면서 운구인 동시에 만세시위가 되었다. 일제는 만세시위를 동반한 운구행렬을 해산시키기 위해 정산의 헌병파견대와 함께 인근 지역의 헌병대를 지원병력으로 급파하였다. 공주(公州)에서 지원 나온 헌병들은 안심리로 들어가는 언덕에 대기하고 있다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는 운구행렬이 보이자마자 무차별적으로 발포하였다. 이 결과 전날에 이어 권흥규의 조카딸 최윤안(崔胤安)을 비롯하여 명정을 쓴 권영진(權寧鎭) 등 여러 사람이 일제 헌병의 총탄에 사망하고 다수가 부상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운구행렬이 해산된 후 일제 헌병의 만세시위 참여자에 대한 조사, 색출과정에서 붙잡혀서 즉결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22일의 즉결심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는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4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