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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준

吳成俊

1885. 3. 30 ~ 1940.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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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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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양주(楊州)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양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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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2)

관련 사건

  • · 양주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1992) 1885년 3월 30일 경기도 양주군(楊州郡) 와부면(瓦阜面, 현 남양주시 와부읍) 송촌리(松村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오흥석(吳興錫)을 사용하였다. 기독교인으로 신앙 생활을 하면서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3월 15일 양주군 와부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양주군 와부면에서는 이정성(李正成)·김춘경(金春經)·김현모(金顯模)·김정하(金正夏) 등 송촌리의 기독교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계획되었다. 이들은 1919년 3월 14일의 모임에서 만세운동을 결의하고, 다음날인 3월 15일을 거사일로 결정하여 실행하였다. 이정성 등으로부터 만세운동의 취지와 계획을 전달받고, 김덕여(金德汝)·이갑동(李甲同)·김덕오(金德五)·이정운(李正蕓)·김윤경(金允京)·이건흥(李建興) 등과 함께 적극적으로 찬성하여 동지로 결합하였다. 이정성·김춘경 등과 함께 3월 15일 아침 일찍 송촌리와 인근지역에서 만세시위에 공감하여 참여한 주민 100여 명을 규합하여 선두에 태극기를 앞세우고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덕소리(德沼里)에 소재한 면사무소를 향해 행진하였다. 만세시위대가 조안리(鳥安里) 일대를 지날 즈음부터 행진하는 길목마다 만세시위의 상황을 파악하고 이에 공감한 다수의 주민들이 동참해 왔다. 만세시위대는 어느새 500여 명의 규모로 확대되었다. 만세시위의 소식을 접한 일제 헌병대는 만세시위대가 면사무소로 진행하는 방향인 덕소리 입구로 출동하여 대기하다가, 만세시위대가 근접하자 시위대를 가로 막고 즉각 해산을 명령하였다. 일제 헌병대의 해산 명령을 무시하고 이정성·김춘경 등의 지휘에 따라 시위대의 선두에서 적극적으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를 계속하였다. 500여 명이 넘는 다수 시위대의 힘으로 일제 헌병대를 밀어내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면사무소를 향해 행진을 계속하였다. 일제 헌병대는 만세시위를 강제로 해산시키기 위해 시위대의 선두에 있던 주도자 3명을 체포하여 연행하였다. 일제 헌병대의 이러한 강압 조치는 시위대를 크게 자극하였다. 일제 헌병대에 맞서 만세시위대의 선두에서 전태현(全泰鉉)·정일성(鄭一成)·이건흥 등과 함께 체포된 주도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헌병주재소까지 밀고 나갔다. 다수의 시위대에게 밀리게 된 일제 헌병대는 비무장이었던 주민들을 향해 위협 사격을 하면서 만세시위대를 강제로 해산시키고, 주도자들을 체포하였다. 이 과정에서 동지 40여 명과 함께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5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재차 상고하였으나 그 해 7월 5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1920년 3월 5일 만기 출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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