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상근
吳相根1883. 10. 8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1)
관련 사건
- · 아산군 선장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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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1) 1883년 10월 8일 충청남도 보령군(保寧郡) 미산면(嵋山面) 삼계리(三溪里)에서 태어났다. 이후 아산군(牙山郡) 선장면(仙掌面) 돈포리(頓浦里)로 이주하여 피고용인으로 생활하는 동시에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4월 4일 아산군 선장면 선장시장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4월 4일 선장면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다수의 시위대가 힘으로 선장헌병주재소를 습격하여 직접 응징하는 등 매우 격렬한 양상으로 전개되어 아산군 지역에서 그동안 전개되었던 만세시위의 절정을 이루었다. 3월 1일 서울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을 선언한 이래 전국 각지에서 만세시위가 거족적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이에 적극적으로 동의하여 선장면의 만세운동을 결의하였다. 시국에 대해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만세운동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던 정수길(丁壽吉)·김천봉(金千鳳)·서몽조(徐夢祚)·임천근(林千根)·최병수(崔炳秀) 등과 함께 선장면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논의하였다. 만세운동 거행에 대한 의견이 모두 일치하자 이들은 선장면 군덕리(君德里)에 소재한 선장시장의 장날인 4월 4일을 만세운동의 거사일로 결정하였다. 이는 장날에 인근의 많은 주민들이 선장시장에 나오기 때문에 만세시위에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4월 4일 동지들과 함께 선장시장으로 이동하였다. 장터에서 주민들이 가장 많이 붐비는 오후 시간이 되자 비장한 심정으로 정수길·서몽조 등 동지들과 함께 선장시장의 한복판으로 나와 준비한 곤봉을 휘두르며, “전국 각지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만세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니, 우리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만세운동을 전개하자”고 호소하였다. 그리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이들의 호소와 독립만세 구호에 공감한 200여 명의 주민들이 호응하여 만세시위에 동참하였다. 정수길·서몽조 등과 이들을 지휘하여 큰 목소리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선장시장의 곳곳을 행진하는 등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렇게 만세시위대의 기세를 한껏 올린 후, 이들을 지휘하여 식민통치의 상징과 같았던 헌병주재소로 이동하였다. 만세시위대가 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정수길·서몽조·임천근·최병수·김천봉 등과 함께 시위군중들을 이끌며 가지고 있던 곤봉과 돌덩이 등으로 주재소를 공격하였고, 시위대의 참여도 독려하였다. 미리 곤봉을 준비한 것은 만세운동의 준비할 때부터 식민 통치의 상징인 일제 헌병에 대한 응징을 계획했기 때문이었다. 돌을 던져 주재소의 장지문과 창문 등을 깨고, 동지들과 주재소 안으로 쳐들어가 곤봉으로 집기와 시설을 부수는 등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일제 헌병들은 온양의 보병 80연대 소속의 상등병 등 7명을 지원받아, 만세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며 대응하였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의 선두에서 함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던 최병수가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사망하였고, 정수길·서몽조·임천근·김천봉 등과 함께 일제 헌병에 붙잡혔다. 1919년 5월 12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로 징역 2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6월 2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이에 재차 상고하였으나 9월 4일 고등법원에서 이유 없음으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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