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복영
吳福泳1889. 1. 27 ~ 1963. 8. 3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안성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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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9년 1월 27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양성면(陽城面) 덕봉리(德峰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오성국(吳聖國)·오보영(吳甫泳)을 사용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에 참여할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다. 안성군 양성면·원곡면(元谷面) 일대에서의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말부터 본격화되었다. 3월 28일부터 말일까지 원곡 지역의 각 마을 주민들은 산발적으로 외가천리(外加川里)에 위치한 원곡면사무소에 몰려가 만세를 외쳤다. 4월 1일~2일 이틀에 걸쳐 대대적인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원곡면 칠곡리(七谷里)의 이유석(李裕奭)·홍창섭(洪昌燮)과 내가천리(內加川里)에 거주하는 이덕순(李德順), 외가천리의 이근수(李根洙)·최은식(崔殷植)·이희용(李熙龍) 등은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벌이도록 추동하였다. 이에 1,000명의 주민들이 이날 밤 8시경부터 원곡면사무소에 모여 시위를 전개하였다. 뒤이어 시위대는 경찰관주재소가 위치한 양성면 동항리(東恒里)로 향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양성면 일대의 주민들이 합세하여 그 규모는 2,000여 명에 달하였다. 주재소 앞에 모인 사람들은 재차 ‘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했으며, 일부 시위대는 주재소에 돌을 던지기 시작하다가 결국에는 주재소 곳곳을 불태웠다. 이어서 시위대는 양성우편소로 진출하였다. 여기에서도 시위대는 만세를 외치는 가운데 전화기를 비롯한 각종 우편소 집기를 파괴하였으며, 전신주 3기를 넘어뜨리기도 하였다. 아울러 시위대 가운데 일부는 인근에 거주하는 일본인 잡화상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에 찾아가 이불, 서적, 시계 등을 불태우거나 파괴하였다. 만세운동은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졌는데, 시위대는 재차 원곡면사무소로 향하여 만세를 외친 후 숙직실과 사무실 집기 등을 불태웠다. 만세시위 초반부터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4월 1일 밤, 시위대가 양성면의 주재소를 공격할 당시 투석행위를 하였고, 뒤이어 사무실로 진입하여 각종 서류와 파손된 의자를 불태웠다. 이후 양성우편소에서도 시위대가 모은 서류들을 인근에 위치한 밭에서 소각하였다. 그런가 하면 일부 시위대와 일본인 고리대금업자의 집에 찾아가서 이불을 불태웠고, 양성면사무소에서도 각종 장부, 서류를 불 속에 집어넣었다. 이 일로 붙잡혀 내란죄 적용 문제를 두고 오랜 조사를 받았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내란죄를 적용하지 않기로 하고 경성지방법원으로 관할 재판소를 지정받았다. 같은 해 8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변호사들의 사법 절차 문제 지적 법정투쟁 결과 공소 불수리 처분을 받았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건조물 소훼죄, 소요죄 등으로 징역 3년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서홍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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