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찬엽
余燦燁1889. 7. 14 ~ 1954. 12. 17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의령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9년 7월 14일 경상남도 의령군(宜寧郡) 칠곡면(七谷面) 도산리(陶山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4~15일에 일어난 의령군 의령면 읍내 만세시위와, 3월 17일 칠곡면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붙잡혀 옥고를 겪었다. 의령군 최초의 만세운동은 3월 14일 의령면 읍내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였다. 의령면 만세시위는 의령면 동동(東洞)에 거주하던 구여순(具汝淳)이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접하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내려와 이우식(李祐植)·김봉연(金琫淵)·최정학(崔正學)·정용식(鄭容軾) 등을 규합하여 준비되었다. 이들은 거사일을 3월 14일에 읍내 장날로 정하고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1919년 3월 14일 오후 2시경, 읍내 의령향교 앞에서 구여순의 연설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이날 읍내로 나가 시위대에 합류하여 적극적으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만세시위에는 의령공립보통학교 학생들 300명 등 군내 각 지역에서 온 주민들을 포함하여 3,000명 정도가 참여하였다. 이때 선두에서 시위대를 이끌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읍내 중심부를 행진하고, 군청·경찰주재소 등의 기관들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비가 내린 3월 15일에도 1,500명이 의령향교에 모여서 전날과 동일한 방식으로 만세시위를 일으켰고, 16일까지 이어졌다. 군내 중심부에서 연일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위기감을 느낀 일제 군경의 본격적인 진압과 주도자 체포가 진행되었다. 마산의 일본군 포병대까지 파견되어 폭압적인 진압에 가세하였다. 군내 전역에 걸친 대대적인 시위 주도자 색출이 시작되고 마구잡이로 사람들을 체포해 경찰주재소로 끌고 갔다. 읍내에서의 만세시위가 어려워지자 여세병(余世炳) 등과 함께 거주지인 칠곡면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하였다. 거사는 3월 17일 밤에 단행되었다. 200여 명의 시위대가 면 중심부에 모여 만세를 부르고, 면사무소로 몰려가서 기물과 유리창을 파손하는 등 물리력을 동반한 격렬한 시위를 일으켰다. 여세병 등과 함께 선두에서 시위대를 이끌고 만세를 부르며 적극적으로 시위에 참여하였다. 3월 14일 의령군 읍내에서 최초로 만세시위가 있은 이후부터 매일같이 시위가 이어지고, 군내 5일장 개최 지역을 따라 확산되는 양상을 보이자 일제 군경은 대대적인 시위 주도자 검거 작전에 나섰다. 군내에서 100명 이상이 체포되는 상황이 벌어졌고, 여찬엽 등과 함께 붙잡혔다. 일제 군경의 가혹한 조사를 받고 기소되어 재판에 넘겨져 1919년 4월 27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소요죄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