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呂丙根

丙根

1872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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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呂丙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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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중화(中和)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남도 중화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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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15)

관련 사건

  • · 상원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15) 평안남도 중화군(中和郡) 풍동면(楓洞面) 영천리(靈泉里) 출신이다. 1919년 당시 판결문에 따르면 48세로 1872년생으로 추정된다. 농업에 종사하였고, 1919년 3월 3일 상원군 신읍(新邑)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혀 옥고를 겪었다. 중화군의 만세운동은 천도교도들을 중심으로 1919년 3월 2일 상원군 신읍(新邑)에서 시작되었다. 상원 신읍은 평양(平壤) 시내에서 약 80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여 이전부터 평양과 밀접하게 교류하고 있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평양의 소식이 빠르게 전파되는 지역이었다. 3월 1일 평양에서 독립선언문서가 발표되고, 만세시위가 일어났다는 소식은 그날 바로 상원 신읍으로 전달되었다. 서울과 평양의 만세운동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여 다음날인 3월 2일 천도교인들을 중심으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천도교도를 중심으로 조직된 만세시위대는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읍내를 행진하였다. 이후 시위대는 주재소로 몰려가서 주재소의 철거를 요구하며 일제 경찰들의 총기와 탄약을 탈취하고, 당시 지역 순찰을 위해 상원 신읍을 방문하고 있던 중화군의 경찰서장을 감금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상원 신읍의 다급한 상황을 접수한 일제는 평양경무부를 통해 지원 병력을 급파하여 무력으로 만세시위대를 진압하고 다수의 주민들을 체포하였다. 상원군 신읍에서 발생한 만세시위 소식을 전해 듣고, 여기에 참여할 것을 결심하고 다음 날인 3월 3일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3월 3일의 만세시위는 천도교인과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각각 전개되었는데, 먼저 만세시위를 전개한 것은 기독교인들이었다. 오후 3시 경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한 만세시위대는 ‘조선독립만세’를 연창하며 시가 행진을 전개한 후, 약 50명의 주민들이 주재소를 습격하여 체포된 사람들의 탈환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주재소에는 시위대에 의해 감금된 중화경찰서장을 빼내기 위해 일제 군경이 대기하고 있었다. 시위대와 일제 군경과 격투가 벌어져 일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오후 4시가 되자 천도교인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만세시위가 일어났는데, 기독교계 시위대와 마찬가지로 일제의 군대와 충돌하였다. 이 과정에서 10여 명의 사상자 발생하였고, 다수의 주민들이 일제 군경에 붙잡혀갔다. 이날의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무력으로 탄압하는 일제 군경에 맞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격렬히 저항하다가 만세시위의 주요 인물로 지목되어 붙잡혔고, 조사 후 재판에 회부되었다. 평양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19년 6월 10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재차 불복하여 “민족자결주의를 세계 만국에 공포하고, 또 경성민회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함에 따라 조선민족의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만세를 화창했을 따름인데, 이를 처벌함은 부당하다”며 상고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24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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