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呂九芳

九芳

1886. 8. 15 ~ 1963.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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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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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영동(永同)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북도 영동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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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학산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6년 8월 15일 충청북도 영동군(永同郡) 학산면(鶴山面) 지내리(池內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규방(圭滂)을 사용하였다. 1919년 4월 16일 학산면 만세운동과 학산주재소 습격을 주도하였다가 붙잡혀 옥고를 겪었다. 영동군 학산면에서는 전국적인 만세운동의 영향과 일제의 노동력 수탈에 대한 직접적인 불만이 폭발하여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뽕나무 묘목의 강제 배부와 함께 험준한 산악지대인 충북 영동과 전북 무주(茂朱)에서 소백산맥(小白山脈)과 금강(錦江)을 가로질러 남북으로 연결하는 도로공사에 대한 주민들의 부역 동원은 사망, 부상 등의 위험이 높아 주민들의 일상을 위협하는 대표적인 일제의 수탈 정책이었다. 이 때문에 1919년 3월 29일 학산리(鶴山里)의 주민 200여 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일제 관공서를 공격한 만세시위를 시작으로 4월까지 일제의 관공서를 무력으로 습격하는 격렬한 만세시위가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내리의 김승림(金升林)은 새로운 만세운동을 결심하고, 마을 서당에서 함께 공부하며 친분이 두터웠던 사람들을 접촉하였다. 평소 국권 상실에 대한 울분을 공유하던 김승림으로부터 만세운동에 대한 제안을 받고 함께 공부한 박두업(朴斗業)·박원보(朴元甫)·(來碩)·정화중(鄭化中)과 형제지간인 여규병(呂圭炳)·여구일(呂九一·圭一)·여중선(呂中仙) 등과 함께 즉시 동의하여 만세운동 준비에 나섰다. 이들과 비밀리에 협의하여 많은 주민들이 강제로 동원되어 불만이 높은 영동-무주 간 도로공사의 주민 동원일인 4월 16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공사에 동원된 주민들에게 독립의 필요성을 호소하여 만세운동을 일으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만세시위 주도자들과 함께 4월 16일 오전 영동-무주 간 도로공사 현장에 나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고, 공사에 동원된 주민들에게 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수백 명의 주민들이 만세시위에 동참하여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김승림·박원보·여규병 등과 함께 만세시위대를 지휘하여 주민들의 부역 동원을 주도하여 원한이 높았던 학산주재소를 습격하였다. 김승림·여구일 등과 시위대의 선두에서 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지고, 기물을 파손하는 등 습격을 주도하였다. 만세시위에 참여한 주민들도 대거 주재소의 습격에 나서 기물을 완전히 파괴하였다. 다시 시위대를 지휘하여 영동-무주 간 도로에 가로수로 심기 위해 일제가 마련해 놓은 뽕나무 밭으로 가서 묘목 수만 그루를 모두 소각하는 등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격렬한 시위 소식을 듣고 출동한 일제 경찰이 총기를 발포하며 시위대를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만세시위의 중심인물로 파악되어 붙잡혔다. 일제 경찰의 조사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는 이유로 법원으로 송치되었다. 1919년 6월 13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소요죄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다가 6월 19일 항소를 취하하고 일제의 감옥에서 1년 간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도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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