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치인
嚴致仁1894. 9. 10 ~ 1921. 12. 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5)
관련 사건
- · 고원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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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5) 1894년 9월 10일 함경남도 고원군(高原郡) 하발면(下鉢面) 덕흥리(德興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고, 3월 19일 군내면 석연리 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혀 옥고를 겪었다. 1919년 3월 1일 서울과 평양(平壤) 등지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곧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3월 10일을 전후로 함경남도 고원군에서는 만세시위를 일으키기 위한 준비가 진행되었다. 3월 10일 고원군 하발면(下鉢面)에 거주하는 박헌영(朴憲榮)과 임근태(林根泰) 등은 3월 14일 하발면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그들은 3월 14일 동산시장에 모여서 큰 소리로 독립만세를 세 번 부르자는 내용의 통지서를 만들어서 군청 임시 서기로 있었던 서병하(徐丙河)에게 인쇄를 부탁하였다. 3월 12일 밤에 서병하는 군청 사환실에서 통지서 210장을 인쇄해서 박헌영에서 전달하였다. 박헌영은 도정리에 거주하는 김태익에게 통지서 20장을 건네주면서 배포를 부탁했으며, 이어서 서병하에게도 통지서를 나누어 주었다. 이에 서병하는 김창진(金昌鎭)과 이진선(李鎭善)에게 통지서를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김창진과 이진선은 김사경(金思磬)·김사명(金思明)·김사종(金思宗)·김사순(金思順)에게 격문을 마을 청년들에게 배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3월 13일 고원헌병분견소에서 해당 통지문을 발견하였다. 이에 그 날 밤 헌병대는 만세시위를 주도한 박헌영 등을 끌고 갔으며 시장을 폐쇄하였다. 일제 당국의 삼엄한 경계에도 불구하고 고원군 일대에서는 만세시위를 추진하는 움직임은 계속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군내면에서는 유관흥(劉寬興)이 만세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손병희를 비롯한 민족대표가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전국 각 지역에서 독립선언에 호응하는 만세시위가 일어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유관흥은 3월 19일 덕지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3월 18일 하고읍리의 소나무 숲에서 만세시위에 사용할 태극기 300장을 만들었다. 3월 19일 석연리 장터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하발면 흥덕리 구장으로서 석연리 덕지 장터에서 시작된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유관흥은 천도교도와 개신교 신자를 비롯한 주민 20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이 기회에 독립해서 자치하여 한다는 연설을 하였다. 이어서 유관흥은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서 모인 인사들에게 미리 만들었던 태극기를 나누어주었다. 시위대의 일원으로 김중생(金重生)·맹태유(孟泰裕)·김한수(金翰洙)·오창옥(吳昌玉)·김대복(金大福) 등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부르면서 행진하였다. 그러자 고원헌병분견소 헌병들은 시위대를 강제로 해산시켰으며 시위를 주도한 인사 30여 명을 체포하였다. 이때 시위주도자들과 함께 붙잡혀 1919년 4월 18일 함흥지방법원 원산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고, 같은 해 5월 1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을 취소하고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재차 상고하였으나, 그해 6월 12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으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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