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명준
魚命俊1870. 7. 24 ~ 1971. 4. 3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거창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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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70년 7월 24일 경상남도 거창군(居昌郡) 가서면(加西面, 현 거창군 가조면) 석강리(石岡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함종(咸從)으로, 거창군 가서면 석강리에는 임진왜란 이후 조성된 함종 어씨의 집성촌이 있었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에도 이곳에서 거주하였다. 3월 20일 거창군 가서면의 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붙잡혀 옥고를 겪었다. 형인 어명철(魚命喆)도 3월 22일 거창읍의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옥고를 겪었다. 1919년 3월 1일 서울과 평양 등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3월 3일 부산과 마산에 독립선언서가 배포되면서 경상남도 일대로 확산되었다. 거창 지역에서는 유림들이 만세운동에 앞장서고 농민을 포함한 지역민이 참여하는 형태로 확산되면서 치열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3월 20일 가서면 장날에 전개된 만세시위와 3월 22일 거창읍 장날에 일어난 만세시위가 대표적이다. 전국적인 만세운동의 소식을 전해 듣자 가북면(加北面)의 김병직(金秉直)과 뜻을 같이하여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3월 20일 가서면 장기리(場基里)의 장날에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하고 비밀리에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3월 20일 정오 김병직과 함께 장기리 시장에 모인 400~500여 명의 군중들 앞에서 구호를 선창하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리고 김병직과 함께 시위 대열에서 빠져나와 가북면 용산리(龍山里)에 있는 용산헌병분견소로 이동하였다. 일본군 헌병들이 장기리 시위 현장으로 모두 출동하여 비어 있던 헌병분견소로 들어간 두 사람은 비치 문서를 찢고 유리창과 기물을 파손하였다. 그러다가 5~6명의 시위 군중을 체포하고 돌아온 일본군 헌병들과 부딪쳐 난투를 벌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반죽음 상태에 이르러 붙잡혀 다음날 아침 거창 일본군 헌병대로 압송되었다. 두 사람이 일본군 현병대에 갇히게 되자 오문현(吳文鉉)·신병희(愼炳禧)·어명우(魚命佑)·어명철(魚命喆)·이병홍(李秉洪)·김호(金濩) 등 지역 유지들이 가서면 석강리 정자나무 아래에서 비밀 회의를 갖고, 3월 22일 가서면과 가북면(加北面)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계획을 탐지한 거창의 일본군 헌병대는 3월 22일 아침 주도 인물인 김채환(金采煥)·김호·오문현·어명철·최영순(崔榮淳)을 붙잡아 헌병분대로 끌고 갔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가서면과 가북면 군민 3,000여 명이 오후 2시30분경 가서면 장기리 만학정(晩鶴亭) 앞에 모여 만세시위를 하면서 구속된 인물들을 구출하기 위해 거창읍으로 향하였다. 시위 대열이 살피재에 이르렀을 때 거창 일본군 헌병대와 용산헌병분견대가 합세하여 진로를 차단하고 해산을 명령하였다. 그리고 일본군 헌병대는 해산 명령에 응하지 않고 독립만세를 부르던 시위 군중을 향해 발포하였고, 다수의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일로 1919년 5월 31일 부산지방법원 거창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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