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대선
魚大善1871. 9. 6 ~ 1922. 9. 6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서울 만세시위
- · 임시정부 자금모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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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71년 9월 6일 경기도 여주군 가남면(加南面) 신문동(新文洞, 현 대신리)에서 태어났다. 본적지는 서울 가회동(嘉會洞) 56번지였으며 유생이었다. 본관은 함종(咸從), 호는 시제(時齊)이다.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 만세시위에 참여하였고, 이어서 3월 5일 유생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청량리 만세시위에서 연설을 하였다. 192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위한 독립운동 자금 모집에 나섰다. 1919년 3월 1일 오후 3시 경 종로사거리에서 탑골공원을 나와 행진하는 군중에 합류하여 만세를 불렀다. 만세를 부르며 시위대와 함께 대한문·서대문을 지나 독립문을 돌아 아현리(阿峴里)까지 갔다가 다시 서대문까지 행진하였다. 3월 5일에는 고종의 반혼제 때 마차가 청량리를 지나가면 청량리에서 유생들이 모여 통곡을 하기로 한 계획을 알고 청량리에 나갔다. 이 자리에서 “파리에서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되므로 우리도 독립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는 취지의 연설을 하였다. 연설 도중 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되어 연설을 중지하고 유준근(柳濬根)·송주헌(宋柱憲)·백관형(白觀亨) 등을 포함한 군중들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3월 12일에는 영흥관(永興館)에 모여 13도의 대표로서 김백원(金百源)·문일평(文一平)·차상진(車相晋)·조형국(趙衡國)·문성호(文成鎬) 등의 목사·유생 11명과 함께 「애원서(哀願書)」라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애원서」는 손병희(孫秉熙) 등의 33인의 독립선언을 계승한다는 뜻을 밝힌 것이었다. 차상진·문성호는 「애원서」 한 부를 조선총독에 제출하였으며, 문일평은 종로 보신각 앞에서 이를 낭독하였다. 이로 인해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고,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재차 상고하였으나 그해 4월 8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인 1921년 3월경 이영선(李英善)에게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李始榮)의 독립운동비 모집 의뢰장과 임시정부 발행 명의의 독립공채증서를 교부 받았다. 당시 태극교 교육과장으로 임시정부를 위한 독립운동비를 제공하기 위해 남부지방의 유생들을 중심으로 독립공채를 판매하고자 하였다. 변호사 이중혁(李重赫)에게 독립운동자금 모집 계획을 알리고 공채 12,200원을 전달했다. 이에 이중혁은 임시정부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고 있던 윤철(尹喆)에게 독립운동비를 위탁하였다. 1921년 5월 24일 윤철의 집에서 윤철·이중혁 등과 함께 붙잡혔다. 이로 인해 1922년 3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였으나 1922년 9월 6일 경성복심법원의 재판이 있기 전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송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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