梁太煥
太煥1885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둔남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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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1) 전라남도 영광군(靈光郡) 법성면(法聖面) 언목리(言木里) 출신이다. 1919년 판결문에 35세로 기록된 것을 보아 1885년생으로 추정된다. 불교 신자였으며, 1919년 무렵에는 은선암(隱仙庵)의 승려로 있다가 그 해 3월 일어난 임실군(任實郡) 둔남면(屯南面) 오수리(獒樹里)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둔남면 오수리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고종(高宗)의 장례에 참여하러 서울에 올라갔다가, 만세시위를 목격하고 내려온 이기송(李起松)이 주도하며 준비되었다. 이기송은 이기우(李起嵎)·이윤의(李倫儀)·이주의(李注儀)·심상룡(沈尙龍)·이회렬(李會烈)·오병용(吳秉鎔) 등과 함께 임실군 둔남면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였다.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 독립이 논의되고 있기 때문에 2천만 한국인들이 협력한다면 독립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므로, 크게 만세를 외쳐서 파리강회회의의 주의를 환기시키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하였다. 또 사전에 천도교·기독교 신자들과도 연락하여 만세시위에 힘을 보탤 것을 약속받았다. 이에 3월 23일로 예정된 오수리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본격적으로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3월 23일 오후 2시, 사람들이 모인 장터에 이기송 등 7명이 먼저 나서서 태극기 30여 개를 배부하고 앞장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하였다. 이에 호응하는 사람들이 20~30명으로 불어나자, 당황한 일제 헌병은 우선 이기송을 붙잡아 헌병주재소로 끌고갔다. 이에 분노한 더욱 많은 군중이 결집하여 독립 만세를 부르짖으면서 이기송을 풀어줄 것을 요구하였다. 당시 장터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을 목격하고는 이에 동참하였다. 만세운동 초반부터 장터에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독립운동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결사의 정신으로 만세를 불러야만 성공한다는 내용의 연설을 하였다. 이에 설득된 사람들이 점점 더 모여들기 시작하였고, 최종적으로 모인 군중은 2,000명에 달하였다. 시위 주도자인 이윤의·이주의 등과 함께 수백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이끌고 헌병 주재소로 향하였다. 군중 중 일부는 일제 순사를 구타하고 협박하여 붙잡혀간 이기송을 석방하게 하였고, 일부는 면사무소와 헌병주재소에 돌을 던져 파괴하였다. 다른 일부는 시장 근처에 위치한 일본인의 여관 등 상점에 쳐들어가 파괴하여 1,500엔 상당의 피해를 입혔다. 이때 그 주변 일대에 모인 주민들에게 “결사의 의지로 난을 일으켜야 독립이 되며, 이 기회에 일본인을 모두 물리치고 독립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내용으로 힘주어 연설하였다. 마침 군중의 협박을 피하여 헌병 주재소를 빠져나와 도망가던 일본인 순사보 등이 근처를 지나가자, 근방에 있던 150여 명의 주민들을 지휘하여 순사들에 돌을 집어 던지며 항거하였다. 이후로도 이기송 등 주도자들이 앞에서 시위를 지휘할 때, 그 주변에서 주민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요지의 연설을 행하였다. 이날 시위에서 일본에 협력하는 자들은 모두 시위대에 굴복하여 무기를 빼앗기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칠 수밖에 없었다. 저녁이 되어 남원 헌병 분대와 임실 경찰서에서 지원 병력을 급파하였지만 군중의 저항이 격렬하여 쉽게 시위대를 해산시키지 못하였다. 급기야 일제 헌병들은 시위대에 총을 쏘는 등 폭력으로 탄압했고 결국 시위대 일부가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수리 주민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았고, 300~400명에 이르는 주민들은 밤새도록 만세를 부르며 오수리 일대를 돌아다녔고, 다음날인 3월 24일 아침에야 스스로 시위를 멈추고 자진 해산하였다. 이후 일제 헌병들이 각지를 수색하며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검속할 때 붙잡혀 헌병대에서 심문을 받고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7월 31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이른바 소요(騷擾)로 징역 5년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였으나, 1919년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같은 해 10월 30일 고등법원에서 “조선 민족으로서 이 시대를 맞이하여 만세를 크게 외침을 당연한 일이다”라며 상고하였지만, 마찬가지로 기각되면서 최종 징역 5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이는 오수리 시위를 계획하고 주도했던 이기송 다음으로 높은 형량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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