梁壽根
壽根1898. 6. 27 ~ 1977. 2. 26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7)
관련 사건
- · 동래군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1997) 1898년 6월 27일 경상남도 부산(釜山)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경상남도 부산부(釜山府, 현 부산광역시) 동래군(東萊郡) 북면(北面)에 위치한, 범어사(梵魚寺)가 운영하는 중등학교(中等學校)인 지방학림(地方學林)에서 수학하고 있다가 동래군 범어사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던 김법린(金法麟)·김영규(金永奎)·차상명(車相明)·김상기(金相琦)·김한기(金漢琦) 등 7명의 범어사 승려들과 졸업생들은 3월 4일 독립선언서를 들고 부산 범어사로 내려왔다. 이들은 범어사 학생들을 중심으로 3월 18일 부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하고, 학생들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1919년 3월 17일 저녁 김영규·차상명·김봉환(金奉煥)·김상기·김한기 등 5명의 승려들과 졸업생들은 범어사 내에서 개최된 명정학교(明正學校)와 지방학림 졸업생 송별회 석상에서 30~40명의 학생들에게 만세운동에 대한 자신들의 계획을 전달하였다. 이때 송별회 자리에 참석하고 있다가 다른 학생들과 함께 그들의 계획에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며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다짐하였다. 졸업생 송별회 축사를 마친 김영규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한 후, 40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일제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어두운 밤에 범어사를 출발했으며, 큰 도로가 아닌 선리(仙里) 뒷산과 동래(東來) 향교(鄕校) 뒷산을 통해 동래읍으로 이동하였다. 동래읍에는 허영호(許永鎬)가 미리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각각 1,000매씩 준비해두고 있었다. 3월 18일 새벽, 140여 명의 범어사 학생들과 함께 동래 복천동(福泉洞)에 있는 불교포교당(佛敎布敎堂)에 도착하여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 순간 일제 군경 20여 명이 불교포교당으로 들이닥쳐 김영규·차상명·김상기·김한기 등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범어사 승려들과 졸업생들을 경찰서로 연행하고, 나머지 학생들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당시 명정학교 학생이었던 오계운(吳啓運)이 일본인 교사 나카무라(中村)에게 만세운동 계획을 밀고하는 바람에 발각되었다. 주도자들이 강제로 연행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4월 18일 밤 이근우(李根雨)·김해관(金海管)·김재호(金在浩)·박재삼(朴在森) 등 40여 명의 명정학교·지방학림 학생들과 함께 동래읍 서문 부근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이어갔다. 시위대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동래시장을 거쳐 남문에 이르기까지 격렬한 만세운동을 펼친 후 해산하였다. 1919년 3월 19일 아침에는 윤상은(尹相殷)·허영호(許永鎬) 등이 미리 동래시장으로 이동하여, 허영호가 작성한 “일사(一死)는 자유를 얻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는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격문 수백 매를 동래시장에 모인 군중들에게 배포하면서 저녁에 있을 만세운동에 대비하였다. 3월 19일 오후 5시경, 이근우 등 명정학교·지방학림 학생들과 함께 동래시장 남문 부근에서 만세운동을 시작하였다. 이때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동래경찰서 문 앞까지 시위행진을 이어갔다. 이처럼 명정학교·지방학림 학생들이 중심이 된 만세운동이 고조되자 일제 군경은 무자비한 탄압으로 시위대를 강제 진압하기 시작하였고, 이로 인해 만세운동을 전개한 23명의 학생들과 함께 붙잡혔다. 1919년 4월 26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1919년 5월 2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노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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