楊錫龍
楊錫1892. 6. 12 ~ 1942. 11. 18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병영청년회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3)
관련 사건
- · 하상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1993) 1892년 6월 12일 경상남도 울산군(蔚山郡) 하상면(下廂面) 연암리(蓮岩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4일 전개된 울산군 하상면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일제로부터 고초를 겪었다. 울산군 하상면 병영리(兵營里)에서 조직된 청년 비밀결사인 병영청년회(兵營靑年會) 간부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던 중 1919년 서울을 시작으로 전개된 만세운동 소식을 접하였다. 만세운동의 전국적인 확산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소식이 지역 사회에도 전파되면서 만세운동에 대한 의지가 점차 고취되어 갔다. 1919년 4월 이종욱(李鍾旭)·박영하(朴永夏)·이종근(李鐘根) 등과 함께 4월 4일 경상남도 울산군 하상면 서리(西里) 사립 일신학교(日新學校)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협의하고 준비하였다. 4월 3일 이종근의 집에 비밀리에 모여 만세운동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했고, 이후 박영하의 집에서 독립선언서 인쇄와 태극기 제작에 착수하였다. 이때 이종룡(李鐘龍)과 함께 태극기 제작의 책임을 맡고 500매에 달하는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그리고 종이와 명주에 ‘구대한국 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라고 대서특필한 큰 깃발도 만들었다. 동지들이 독립선언서 인쇄를 위해 하상면 면사무소의 등사판을 가져왔으나 고장이 나서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카본 복사지로 200매를 제작하였다. 만세운동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마친 후 1919년 4월 4일 오전 9시 병영청년회 회원들과 함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품에 품고 일신학교 교정으로 이동하였다. 일신학교에 도착한 후 학생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눠주면서 만세운동 참여를 권유하였다. 오전 11시 40분 무렵 가장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높이 흔들며 하상면 만세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깃발을 올리자 만세시위대에 참여한 주민들이 동시에 준비한 태극기를 꺼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이에 주위의 학생들과 주민들도 호응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선두에서 시위대를 이끌고 서리, 동리(東里), 남외리(南外里), 산전리(山田里)를 돌면서 만세운동을 지휘하였다. 하상면 주민들이 이에 호응하면서 순식간에 시위대 숫자는 200여 명에 육박하였다. 만세시위가 고조되자 다급해진 하상경찰관주재소는 울산경찰서에 연락하여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울산 경찰서장을 비롯한 8명의 경찰과 일본군 수비대 5명이 하상면에 급파되었다. 일제 군경은 하상면 만세운동을 강제 진압하기 위해 무자비하게 시위대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일제 군경의 공격을 피해 남문 쪽으로 피신하였으나, 쫓아 들어온 군경에게 무수히 구타당한 끝에 붙잡혔다. 함께 붙잡힌 이종욱 등 14명의 동지들과 함께 울산경찰서에 구금되었고, 만세시위대는 일제 군경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인해 결국 해산되었다. 이후 1919년 4월 22일 부산지방법원 울산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1919년 5월 2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 당하였다. 다시 상고하였지만, 1919년 7월 12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노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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