梁啓殷
啓殷1882. 12. 14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1)
관련 사건
- · 수안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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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1) 황해도 수안군(遂安郡) 연암면(延岩面) 율리(栗里) 출신이다. 정확한 생몰연도는 확인되지 않으나 판결문에 따르면, 1920년 당시 38세에 12월 14일에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있어 1882년 12월 14일생으로 추정된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3월 3일 수안군 수안읍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에 서울을 비롯해 7개 도시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던 민족대표 중 한 사람이었던 이종일(李鍾一)은 황해도 곡산군(谷山郡) 곡산면(谷山面) 남천리(南川里)에 거주하는 이경섭(李景燮)에게 만세시위를 전개하라는 지시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였다. 이에 3월 1일 저녁 이경섭은 수안군 내 천도교구가 위치한 수안군(遂安郡) 수안면(遂安面) 석교리(石橋里)에서 수안천도교구장 안봉하(安鳳河)를 비롯해서 천도교 인사들과 회합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이경섭은 이들에게 만세운동 소식과 더불어 독립선언서 70장을 전달하면서 수안군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권유하였다. 평소 독립을 염원하였던 안봉하를 비롯한 수안군 내 천도교 인사들은 3월 2일에 수안천도교구실에서 회의를 가졌다.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3월 3일에 수안읍에서 천도교인들을 규합해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런데 황해도 경무부장의 지시를 받은 수안헌병분대가 수안천도교구실을 임의로 수색하였다. 그 과정에서 독립선언서가 발견되자 헌병대는 안봉하를 비롯한 천도교 인사들을 수안헌병분대로 연행하였다. 헌병대의 검거를 피한 이영철(李永喆)·홍석정(洪錫楨)·한청일(韓淸一)은 3월 3일에 만세시위를 예정대로 전개하기로 결심하고 수안군 내 천도교인들의 참여를 독려하였다. 3월 2일 저녁에 연암면 율리를 방문한 오관옥이 만세를 외치면 독립된다는 말을 전하면서 다음날 만세시위 참여를 권유하였다. 평소 독립을 염원하였기에, 3월 3일 정오에 수안읍으로 나가서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는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홍석정·한청일·오관옥이 이끄는 시위대와 함께 만세를 외치며 수안헌병분대로 향하였다. 특히 11시 경에는 일제 헌병이 헌병분대의 퇴거를 요구하면서 수안헌병분대 경내 진입을 시도하던 시위대를 향해서 발포함으로써 부상자가 속출했던 상황이었다. 시위대와 함께 새끼줄로 차단되어 있었던 정문을 밀고 들어가서 헌병분대의 퇴거를 강경하게 요구하였다. 일제 헌병은 시위대를 향해서 발포하였으며, 시위대를 이끌었던 홍석정과 한청일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고 총상을 입은 오관옥 역시 결국 사망하였다. 일제는 3월 4일부터 수안군에 증원 병력을 파견하였다. 그와 동시에 3월 3일 수안읍 시위 참가자들을 색출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붙잡혔다. 이후 재판에 회부되었다. 내란죄 적용 문제를 두고 오랜 조사와 공판이 이어졌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내란죄를 적용하지 않기로 하고 관할재판소로 경성지방법원를 지정받았다. 같은 해 8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변호사들의 사법 절차 문제 지적 법정투쟁의 결과 공소 불수리 처분을 받았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소요로 징역 1년 6월(구류일수 중 450일 본형 산입)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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