梁濬明
濬明1876. 2. 1 ~ 1949. 12. 23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신민회
- · 임시의정원
- · 안동교통사무국
- · 대한청년단연합회
- · 수양동우회
- · 선천노동조합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76년 2월 1일 평안북도 선천군(宣川郡) 천낙동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한자가 다른 양준명(梁俊明)과 양헌(梁瀗)이다. 어린 시절 한문교육을 받았고 청년 시절인 24세 무렵 장로교인이 되었다. 1908년 이승훈(李承薰)의 권유로 선천군의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였다. 1908년 2월 신민회의 재정후원 단체의 하나로 서북지방의 자본가와 상인들이 토착 자본을 규합하여 상무동사(商務同事)가 설립되었을 때 참여하고 이듬해 2월 임원진 개편 때 총 지점의 책임을 맡았다. 1911년 1월 일제는 '안악사건(安岳事件)'-과 ‘양기탁 등 보안법위반 사건’, 9월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암살음모 사건’ 등을 날조하여 신민회 회원을 대량 체포한 이른바, ‘105인 사건’을 조작하였다. 이때 이 사건에 주도자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붙잡혀 1912년 9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을 받았다. 그러나 1913년 3월 경성복심법원에서 무죄를 받고 풀려났다. 그 후 1916년 무렵 안둥현(安東縣)으로 건너가 아일랜드계 영국인 조지 쇼우(George Lewis Shaw)가 안동에 설립하여 운영하던 무역 선박회사인 이륭양행(怡隆洋行)과 밀약을 맺고 북미(北美)로 한인들의 밀항을 주선하는 활동을 전개하다가 일제로부터 퇴거명령과 거주 제한 명령을 받았다. 선천으로 돌아와 신성중학교(信聖中學校)에 근무하던 중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선천남교회(宣川南敎會) 목사 김석창(金錫昌), 신성중학교 교사 김지웅(金志雄)·홍성익(洪成益) 등과 함께 교인·학생들을 동원하여 선천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리고 그 해 4월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에 참여하였고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교통부 위원에 선임되어 국내외 교통기관의 조직운영과 재정의 수입 지출 등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였다. 1920년 1월 24일 교통부 안동사무국장(安東事務局長) 홍성익이 신병으로 안동 태성당병원(泰誠堂病院)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던 중, 일경의 밀정인 김극전(金克田)의 밀고로 붙잡혀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후임 안동사무국장에 선임되었다. 당시 임시정부 교통국은 일제의 정보망을 피해 국내와의 원활한 통신을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했는데, ‘역체식 진전법(驛替式 進傳法)’이라는 연락 방법을 사용하여 안동현과 국내 간의 통신 연락업무에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안병찬(安秉瓚)·이탁(李鐸) 등이 임시정부와 연락하며 무력에 기반한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중국 성경성(盛京省)에서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 연합회를 결성하자 안동지국을 통해 군자금·군수품을 조달하여 원활한 활동을 조력하였다. 1920년 7월 10일~ 11월 4일까지 임시공채관리국(臨時公債管理局) 공채모집위원(公債募集委員)으로 임명되어 담당 지역인 평안북도 철산군(鐵山郡)에서 공채를 발행하여 독립자금을 모집하였다. 이후 임시정부 교통부의 비서국장(祕書局長)을 겸임하여 활동하다가 1921년 5월 11일 의원면직으로 사임하였다. 임시정부 활동에서 물러난 뒤 선천군으로 돌아와 1925년 4월 선천군의 역락유치원(亦樂幼稚園) 원감(園監), 1926년 2월 선천노동조합(宣川勞動組合)이 설립될 때 부조합장이 되었다. 그리고 1925년 10월~ 1933년 무렵까지는 선천전기(宣川電氣) 주식회사 감사(監事)를 맡았다. 또한 1929년 선천에 수양동우회 선천 지부가 결성될 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37년 6월 동우회사건(同友會事件)으로 선천 지부의 관계자 93명과 함께 붙잡혔다가 11월 불기소로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원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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