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윤숙
楊允淑1875. 12. 2 ~ 1910. 4. 14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독립장(1980)
관련 사건
- · 중기의병(태인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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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80) 1875년 (음)12월 2일 전라북도 순창군(淳昌郡) 구암면(龜岩面, 현 구림면) 금천리(錦川里) 국화촌(菊花村)에서 아버지 석민(錫民)과 어머니 해주 오씨 사이에서 3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남원(南原)이며 자가 윤숙(允淑)이고 호는 춘계(春溪)이다. 본명은 춘영(春泳)이나, 의병항쟁기와 재판 과정에서 윤숙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명으로 인영(寅泳·寅榮)·연영(演泳)이 있다. 고려 말부터 전북 순창에서 세거해온 집안이다. 체포 당시 유생이라 밝힌 점으로 보아 어려서 한학을 수학한 것으로 짐작된다. 어느 시기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군주사(郡主事)를 지내다가 그만 두고 농사를 지었다고 진술하였다. 아마도 을사조약의 강제 체결로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관직을 그만두고 농사를 지으며 시세를 관망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전라도 유생들이 최익현(崔益鉉)을 모시고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1906년 6월 7일 임병찬(林炳瓚)의 권유를 받아들여 채영찬(蔡永贊) 등과 함께 수십 명의 포수들을 데리고 가담하였다. 하지만 열흘도 못되어 태인의병이 해산되자 향리로 돌아와 정국의 추이를 주시하며 지냈다. 1907년 7월 정미조약이 체결되고 고종이 강제로 퇴위되었으며 군대마저 해산되자 대한제국의 사직이 위태로운 상황이라 판단했다. 고심을 거듭하며 국권을 수호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다가 가산을 기울여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하였다. 1908년 음력 2월부터 전남 담양 출신의 임순호(任洵鎬)와 함께 의격문(義檄文)과 통장(通狀)이란 제목의 문서들을 만들어 전라도 각지에 수십 통을 붙이고, 각 군의 향교와 서원에도 이 문서들을 발송하는 등 본격적인 거의(擧義) 준비에 착수하였다. 7월 29일 순창군 구암면 국화촌 인근의 회문산(回文山)에 근거지를 구축하고서 동지들을 불러모았다. 약 1,200명이 호응하여 그 중에서 120명을 선발하고, 총기 270정 및 칼 30자루를 확보하여 의병부대를 편성하였다. 배포한 의격문을 통해 “비록 재주는 없으나 앞장서서 임금과 국모의 원수를 다시 갚아 백성의 원한을 씻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나라와 의병의 행복”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를 위해 각처에 주둔중인 일제 군경을 처단하거나 몰아낼 것이며, 일본을 위해 세금을 거두는 각종 관리들을 ‘일본의 충신이나 대한의 난적’이라 규정하며 처단하리라 예고하였다. 또한 일제의 경제적 침탈, 즉 일본인들이 한국에 들어와 미곡을 수탈하고 일본으로 반출하는 것을 목격한 후 의병을 일으켜 막아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신교육에도 반대의 입장임을 분명하게 밝혔다. 상당수의 우국지사들이 적극 참여하여 양윤숙 의병부대의 지도부를 구성하였다. 좌선봉 최화(崔華), 우선봉 임순호, 중군 최산흥(崔山興), 후군 이국찬(李國贊), 향관(餉官) 서기협(徐基俠), 교련관 한자선(韓自善) 등을 두었으며, 스스로 도총독(都總督)이라 일컬으며 의병부대를 이끌었다. 이때 둘째 동생 상영(湘泳, 자 允鐸) 역시 의병에 참여하였다. 이처럼 대오를 정비하여 곧바로 항일투쟁에 나섰는데, (음)8월 순창군 무림면(茂林面) 화암리(花岩里) 뒷산에서 일제 군경과 교전하였고, 순창경찰서 한인 순사를 처단하였다. 음력 9월 화암리 앞산에서 남원수비대와 격전을 벌였으며, 1909년 음력 정월과 2월에도 순창수비대와 싸우며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1909년 4월 27일에는 오산면(鰲山面) 우곡리(牛谷里)에서 순사대와 교전했으며, 9월 9일에도 구암면 구암동에서 수비대의 통역을 맡은 박찬택(朴贊鐸)을 처단하였다. 또한 1909년 5월 양연영의 이름으로 고종에게 밀서를 올린 일이 일제 측에 탐지되어 곡성의 정봉현(鄭鳳鉉)이 체포되기도 하였다. 같은 해 11월 22일 경에 임실군(任實郡) 강진면(江津面) 갈담리(葛潭里) 변대규(邊大奎)의 집에 와서 “이 집은 일본군 기병대가 사용하던 건물이므로 불을 태우라”고 외치면서 마당에 쌓아놓은 나무더미에 불을 붙여 가옥 3동을 불태우기도 했다. 이처럼 이들은 1908년 중반 이후 1년 이상 일제 군경과 가열한 항일투쟁을 전개했으며, 부일세력 처단에도 앞장섰다. 군자금이 바닥난 후에는 관내 유력자들이나 친일세력의 재산을 군자금으로 징발하여 사용하였다. 일제는 1909년 9월부터 임시한국파견대로 하여금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을 전개하며 전라도 의병을 포위·진압에 나섰다. 순창지역도 포함되어 부하 상당수가 1909년 10월을 전후해서 체포되었고, 행적도 묘연해졌다. 일제의 대규모 군사 작전이 종료된 후에도 일제는 체포를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였다. 일제는 전북 내에 16명의 의병장과 그 부하 300여 명이 활동하는 것으로 파악했는데, 특히 체포를 위한 전담 수색대와 변장대를 편성하여 종적을 추적했으나 헛수고였다. 1909년 11월 20일 일제 군경은 행정기관까지 동원하여 약 20일간 합동작전을 개시한 일지가 남아 있다. 일본군은 순창군 피노리(避老里)에 주둔하며 순창 관내 면장과 동장을 불러 추궁하였으며, 체포된 의병들을 심문하여 소재를 알아내려 혈안이 되었다. 심지어 사유 재산인 양윤숙의 논 11두락의 베지 못한 벼를 관할 군수와 면장더러 일본군 주둔지로 이송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특히 의병활동을 비호하는 지역으로 지목된 임실군 덕치면(德峙面)과 순창군 팔등면(八登面) 면장에게 소재를 말하지 않으면 지정불고죄(知情不告罪) 등을 내세우며 협박하는 한편 가가호호 방문하여 소재를 파악하라고 호소하면서 체포 작전 실패의 책임이 면장과 동장에 있다며 책임을 전가하였다. 심지어 친인척과 친구 등 지인들까지 잡아들여 소재를 추궁했으나 허사였다. 당시 일제는 순창군의 무림면과 구암면 사람들이 의병 은닉에 가장 적극적인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에 따라 순창 관내에 일본군이 장기간 주둔하며 면장과 동장을 비롯한 관내 주민들까지 위협하며 대대적인 수색작전을 펼치자,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수 없게 된 것 같다. 전북 김제에 은신해 있다가 1909년 12월 23일 김제군 월산면(月山面) 봉월리(峰月里)에서 김제수비대에 의해 붙잡혔다. 일제의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부하들의 행적에 대해서는 일체 함구했으며, 오직 국가를 위해 죽을 따름이라고 당당하게 말하였다. 옥중에서, “봉황은 날개가 부러져도 봉황이요, 용은 여의주를 잃어도 용이다, 너희의 네 나라에 대한 충성은 오늘의 번영을 가져왔으나 나의 내 나라에 대한 불충은 오늘의 눈물을 초래했노라”는 애절한 시를 남겼다. 1910년 3월 9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이른바 내란, 방화 등으로 교수형을 받았고, 같은 해 4월 14일 광주감옥 전주분감에서 형이 집행되어 사망하였다. 아내 도강 김씨 장흠(長欽)의 딸 사이에 자식이 없어서 아우 택영(澤泳)의 아들 병관(秉觀)을 양자로 들였다. 1990년에 간행한 소책자 『항일의병장 춘계양공춘영 창의일기(抗日義兵長春溪楊公春泳倡義日記)』가 전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홍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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