梁世奉
世奉1896. 6. 5 ~ 1934. 8. 12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천마산대
- · 광복군총영
- · 참의부
- · 조선혁명군
포상 정보
- · 독립장(1962)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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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62) 1896년 (음)6월 5일 평안북도 철산군(鐵山郡) 세리면(洗里面) 연산동(連山洞)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남원(南原), 호는 벽해(碧海)이고, 본명은 양서봉(梁瑞鳳)이다. 양세봉(梁世奉·梁世鳳)을 이명으로 사용하였는데, 이명이 더 널리 알려졌다. 그밖에 양윤봉(梁允奉)이라는 이명도 사용하였다. 부친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고, 모친의 이름은 김아계(金阿桂)였다. 부친의 배려로 11세 때부터 약 4~5년간 마을 서당을 다니며 천자문과 『명심보감』 등을 배웠다. 그러나 1912년 아버지가 사망하여 가세가 기울자 장남으로써 가족들을 데리고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싱징현(興京縣, 현 신빈현(新賓縣))으로 이주하여 소작농으로 일하며 생계를 떠맡았다. 1919년 만세운동 이후 남만주 각지에서 각종 독립운동 단체가 조직되고 민족운동이 격화되었다. 만세운동 당시 싱징현에서 전개된 한인들의 만세시위에 참가한 이후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1922년 여름 독립단 대장 정창하(鄭昌夏) 휘하의 지방공작원이 되어 활동하였다. 그해 겨울에는 압록강변에서 활동하던 천마산대(天摩山隊) 독립군에 가담하여 평북 창성군(昌城郡) 대유동(大愉洞)의 경찰서와 영림창(營林廠)을 기습하여 많은 군수물자와 군자금을 모집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23년 봄에는 일제 군경의 ‘토벌’이 심화됨에 따라 천마산대의 일원으로 중국 지린성(吉林省) 류허현(柳河縣)으로 이동하여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에 합류하였다. 이 해에 광복군총영의 검사관, 참의부(參議府) 소대장의 직책을 맡아 활동하였다. 1924년 6월에는 참의부 소대를 이끌고 평북 강계·위원 등지에 진입해서 일제 경찰대와 교전하였다. 같은 해 말에는 참의부 제3중대장으로 승진하여 남만주 화뎬현(樺甸縣) 일대의 동포 보호와 항일투쟁, 부일배 숙청사업에 매진하였다. 1926년 11월에는 남만주의 독립운동 영도단체 정의부(正義府) 소속 독립군 제1중대장이 되어 남만주와 국내의 평안도를 넘나들며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1928년 5월 중국 동북지역 소재 독립운동 단체들의 통합을 전제로 한 민족유일당 수립운동에 동참하여 정의부 대표의 한사람으로 지린성 판스현(磐石縣)에서 열린 민족유일당 조직회의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그해 9월에는 신안둔(新安屯)에서 열린 정의부·참의부·신민부(新民府) 대표들의 3부 통합회의에 참가하여 3부 통합과 독립운동 단체들의 단합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3부 통합운동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가운데 정의부를 주축으로 한 한인 교민 자치조직 국민부(國民府)가 새로 발족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1929년 12월 비밀결사이자 독립운동 지도정당인 조선혁명당과 그 산하 독립군으로 조선혁명군이 창건되었다. 이때 조선혁명군 중대장의 중책을 맡아 독립전쟁의 선봉장이 되었다. 조선혁명군 제5중대장을 맡고 있던 1930년 3월 하순, 5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랴오닝성의 대도시 푸순(撫順) 시내에서 협제공사(協濟公司)라는 회사를 경영하고 있던 한인 이상현(李尙賢)의 집에 잠입하여 남만주 한인 교민 자치조직인 국민부에서 부과한 거액의 세금을 징수하였다. 이 자금은 국민부와 조선혁명군의 운영경비로 사용되었다. 또 1930년 8월부터 10월 사이에 국민부 본부 소재지인 신빈현 왕청문(旺淸門) 일대에서 국민부 반대파와 옹호파 사이에 내분이 발생했을 때 옹호파의 입장에 서서 국민부를 수호하는데 앞장섰다. 조선혁명군은 창건 초기에 사령관을 맡았던 이진탁(李辰卓)을 비롯한 사회주의자들과의 내분으로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현익철(玄益哲)·고이허(高而虛) 등과 함께 재정비하였다. 1934년 경 항일투쟁을 위해서 이념+Q182을 달리하는 중국공산당 계열의 동북인민혁명군과도 연합을 모색하였다. 1932년 1월 19일 퉁화(通化) 일본영사관 경찰의 급습으로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 이호원(李浩源), 조선혁명당 군사위원회 위원장이자 조선혁명군 사령관 김보안(金保安), 조선혁명군 부사령관 장세용(張世湧), 국민부 공안부위원장 이종건(李鐘乾) 등 핵심간부 6명이 체포된 ‘신빈사건’ 이후, 조선혁명군 사령관의 중책을 맡아 조선혁명군의 항일무장투쟁을 이끌게 되었다. 또한 1932~1933년 무렵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겸 군사위원회 위원도 겸임하여 남만주 지역 한인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특히 1931년 9월 일제가 중국 동북지방을 침략한 ‘만주사변’ 이후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이 되어 요녕민중자위군(遼寧民衆自衛軍) 등 중국 동북에서 봉기한 중국인 의용군과 연합하여 일제 군경과 괴뢰 만주국군을 상대로 치열하게 싸웠다. 그해 10월까지 조선혁명군은 당취오(唐聚五)가 이끄는 요녕민중자위군과 함께 남두령(南陡嶺) 전투 등 200여 차례의 전투를 치르며 다수의 일본군과 만주국군을 무찔렀다. 특히 이 시기에 벌인 신빈현 영릉가(永陵街) 전투는 조선혁명군이 용맹을 떨친 전투로 유명하다. 이밖에도 신빈현 진주령(珍珠嶺)에서 일본군 열차 습격전투 및 퉁화현 쾌대무자(快大茂子) 전투도 조선혁명군이 거둔 대표적 승전으로 알려져 있다. 1932년 3월 11일 참모장 김학규(金學奎), 중대장 조화선(趙化善)·정봉길(鄭鳳吉)·최윤구(崔允龜) 등과 함께 조선혁명군을 거느리고, 요녕농민자위단(遼寧農民自衛團)이란 중국의용군 왕동헌(王彤軒)·양석복(梁錫福) 부대와 합세하여 푸순 남쪽 방면으로 진격하였다. 이 정보를 접한 일본군은 신빈현성(新賓縣城)을 수비하는 일본군을 동원하여 중무기로 무장하고 한중 연합군을 공격하여 왔다. 그러나 현지 지리에 밝은 조선혁명군과 중국의용군의 반격으로 일본군은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힘을 얻은 한중 연합군은 이를 추격하여 신빈현 서방의 영릉가성(永陵街城)을 점령하고 다시 추격하여 상협하(上夾河)까지 점령하였다. 계속된 5일간의 전투에서 한중 연합군은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고 승전하였다. 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조선혁명군은 흩어진 전열을 가다듬어 총사령부를 환런(桓仁)·신빈·지안(輯安)·퉁화 등의 경계 지점에 두고 산하에 5개로(五個路) 사령부를 거느리는 대부대로 개편하였다. 또한 퉁화현 강전자(江甸子)에 조선혁명군 속성군관학교를 설립하였다. 이때 속성군관학교 교장을 맡아 조선혁명군의 장교와 사병을 양성하고 수천 명의 병력을 훈련시켰다. 1933년 2월에는 조선혁명군 대표로 김학규를 요녕구국회(遼寧救國會)의 영수인 왕육문(王育文)과 당취오에게 파견하여 정식으로 ‘한중 합작 항일공작(抗日工作)’을 도모하는 협상을 성사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퉁화 시내에 설치한 요녕민중자위군 총사령부의 특무대(特務隊) 사령(司令)에 취임하였다. 이에 일본 관동군은 대병력을 파견하고 비행기를 동원하는 등 대탄압작전을 전개하여 1933년 5월 8일 영릉가로 침입하여 왔다. 요녕민중자위군 한중 연합군은 아직 조직이 정비되기 전에 대규모 병력을 맞아 싸우게 되었으므로, 결국 견디지 못하고 패퇴하고 말았다. 1934년 3월 이후 박대호(朴大浩) 등과 함께 압록강에서 그리 멀지 않은 콴뎬현(寬甸縣)을 중심으로 항일무장투쟁을 계속하였다. 신빈현에 있는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의 본거지를 탈환하기 위하여 300~400명의 조선혁명군을 침투시켰다. 또한 중국의용군 등철매(鄧鐵梅)와 합작을 모색하여 북만주 지역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조선혁명군의 활동으로 상당한 타격을 받은 일제는 남만주 유일의 정통 독립군 사령관으로 동포사회에서 큰 신망을 얻고 있던 양세봉을 음해할 비밀공작을 추진하였다. 즉 퉁화 주재 일본영사관에서는 한인 밀정 박창해(朴昌海)와 중국인 부일배 압동양(壓東洋)을 사주하여 한중 합작투쟁을 명분으로 유인하여 제거할 흉계를 꾸몄다. 조선혁명군 독자적으로 강대한 일제 침략 세력과 괴뢰 만주국 군경·관헌 등을 상대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중국 항일세력의 힘을 얻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이들이 한중 합작문제를 상의하자고 제안하자, 이를 필요하다고 여겨 1934년 9월 19일 밤 부관 장명도(張明道)와 몇 명의 부하만 데리고 왕청문에서 환런현 방면으로 중국인 항일세력을 상의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그러나 결국 이 날 밤 남만주 환런현 소황구(小荒溝)에서 한인 밀정 박창해의 총격을 받고 다음날인 (음)8월 12일 사망하였다. 나중에 이 소식을 들은 퉁화 일본영사관에서는 경찰을 보내 이미 묻힌 시신을 파내서 목을 자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장세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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