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원세덕

元世德

1893. 2. 22 ~ 미상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원세덕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충북 단양(丹陽)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북도 단양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17)

관련 사건

  • · 제천군 제천읍 제천시장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17) 1893년 2월 22일 충청북도 단양군(丹陽郡) 가곡면(佳谷面) 보발리(寶發里)에서 태어났다. 원득필(元得必)이라는 이명이 있다. 향리에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4월 17일 인근 지역인 제천읍(堤川邑, 현 제천시) 제천시장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제천의 만세운동은 제천군 잠업계의 조수로 활동하고 있던 모산리(茅山里)의 이범우(李範雨)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범우는 고종(高宗)의 인산(因山)에 참례하기 위해 상경했다가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 후 민족대표 33인 중 한사람인 최린(崔麟)으로부터 귀향 후 지역에서의 만세운동 조직을 당부받았고, 독립선언서를 수령하였다. 제천으로 귀향한 이범우는 1919년 4월 17일 제천시장의 장날을 만세운동의 거사일로 결정하고, 권종필(權鍾弼)·장용근(張用根)·이기택(李起澤) 등 제천공립보통학교(堤川公立普通學校) 졸업생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추진하였다. 이들은 사전에 태극기 1,200여 장을 제작하는 등 의욕적으로 준비했으나, 이 때의 계획은 사전 발각되어 거사 하루 전날인 4월 16일 일제 경찰에 의해 태극기가 압수되고, 이범우와 권종필을 제외한 대부분의 동지들이 붙잡힘으로써 좌절되었다. 하지만, 4월 17일로 계획했던 제천시장의 만세시위는 예정대로 전개되었다. 만세시위 계획이 좌절되어 낙담한 이범우와 권종필은 이날 제천시장에 소재한 주점에 갔다가 새로운 동지들을 만나게 되었다. 주점에서 평소 교류가 있던 이범우를 만나 담소를 나누던 중, 그가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좌절되어 낙담한 상태임을 알게 되었다. 이에 만세시위 계획에 적극적인 찬동의 뜻을 표함과 동시에 하소리(下所里) 이기하(李起夏)도 동지로 소개하였다. 그리고 이범우·권종필·이기하와 함께 즉시 의기투합하여 바로 당일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이날 오후 6시부터 제천시장의 한복판에서 일제히 큰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대한독립만세’의 구호를 듣고, 이에 공감한 주민들이 속속 만세시위에 동참하면서 시위대열을 갖추게 되었다. 이에 더욱 큰 목소리로 다른 주민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면서 행진을 시작하여 제천경찰서 앞에 이르렀다. 만세시위대가 경찰서를 향해 행진해 오자, 일제 경찰과 수비대 15명이 착검을 하고 만세시위를 해산할 것을 강요하였다. 이에 불응하고 행진을 계속하자 일제 경찰과 수비대는 시위대를 향해 실탄 사격으로 대응하였다. 이 결과 이익삼(李益三)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이화춘(李化春)·이윤용(李允容)·박성일(朴聖日) 등이 총상을 입는 비극이 벌어졌다. 이날의 만세시위에서 이범우 등과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혀서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8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고, 같은 해 6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