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梁性皓

性皓

1910. 7. 10 ~ 1965. 5. 10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梁性皓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경남 밀양(密陽)일본방면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밀양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나고야합동노동조합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18)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2018) 1910년 7월 10일 경상남도 밀양군(密陽君) 단양면(丹陽面) 구천리(九川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삼원성호(杉原性皓)·금촌관일(今村貫一)을 사용하였다. 1930년대 초 돈을 벌 목적으로 일본 아이치현(愛知縣) 나고야시(名古屋市)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은 1930년 기준 16,000명 정도였고, 이 중 노동자는 사무직 100여 명을 제외하고 모두 토목공사장 인부, 하역장 인부, 공장 보조 등 비숙련 단순 직종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로 볼 때 일용직으로 생계를 유지한 것으로 추정된다. 1936년부터 한인 노동자의 권익향상과 조국 독립을 위해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이 지역에는 일본공산당과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日本勞動組合全國協議會) 소속 한인들의 주도로 노동단체 통일조직인 나고야합동노동조합(名古屋合同勞動組合)이 결성되어 있었다. 이 단체는 각종 시위를 기획해 조선인 노동자들의 권리 신장에 노력했으며, 파업 투쟁을 지도·원조하여 대개 승리로 이끌었다. 지역 내 한인 노동자 다수가 조합 회원으로 가입한 상황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이러한 조건을 이용하여 노동자에게 공산주의 이론을 교육하는 한편, 각 공장 내 시위를 추동하였다. 또한 일제의 침략전쟁을 규탄하고, 반파시즘 운동을 전개하였다. 나고야합동노동조합은 1936년 12월 5일 일제 경찰의 탄압으로 대다수의 간부가 체포됨으로써 붕괴되고 말았다. 그러자 채병호(蔡炳鎬)·김영교(金永敎) 등은 이튿날 남은 사람들을 규합해 조합 재건운동에 착수하였다. 수차례 회합 끝에 이들은 1937년 3월 15일 20명의 동지와 모임을 갖고 “일반근로대중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조직화하여 천황제 자본가 지주의 국가를 절대 타도”할 것을 결의한 뒤 조직 재건을 선언하였다. 같은 해 4월 무렵 조합 지도자인 채병호와 재정부위원 정차원(鄭次元)과 함께 노동조합 복구 활동에 나섰다. 노조 간부들과 함께 돈벌이를 가장하여 관서전철공사(關西電鐵工事) 인부로 위장 취업한 뒤, 미에현(三重縣) 구와나시(桑名市)에 나고야합동노동조합 지부 재건에 성공하였다. 1937년 5월에는 도야마현(富山縣) 가미니이카와군(上新川郡) 오야마무라(大山村)로 이동하여 공사 현장의 식당 등을 돌며 노동자를 선동, 규합함으로써 도야마합동노동조합(富山合同勞動組合) 재건에 힘썼다. 이밖에 러시아혁명기념일, 메이데이, 3·15 및 4·16 일본공산당 탄압 기념일에 공동투쟁좌담회를 개최하였다. 그리하여 조합원에게 공산주의를 선전하는 한편, 반전의식과 민족의식 앙양해 적극적인 투쟁에 나서도록 하였다. 일제 경찰의 탄압 과정에서 조직이 노출되어 1937년 9월 13일 나고야합동노동조합의 다른 동지 6명 함께 붙잡혔다. 같은 해 11월 30일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아이치현지방검사국에 송치되었다. 1939년 3월 3일 김순득(金順得)과 함께 기소유예로 풀려날 때까지 약 1년 5개월 동안 고문과 학대를 당하며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진웅⋮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