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봉선
魚鳳善1890. 7. 13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3)
관련 사건
- · 후기의병(윤인순 의병부대)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3) 1890년 7월 13일 경기도 양주군(楊州郡) 석적면(石積面) 덕도리(德道里)에서 태어났다. 농업에 종사하였다. 1907년 일제에 의한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해산 이후 국권회복을 위해 윤인순(尹仁順)이 경기도 양주에서 거의(擧義)하자, 이에 호응하여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윤인순은 경기 양주 농민 출신의 평민 의병장으로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결성하여 양주·석치(石峙) 등에서 일본군과 유격전을 전개해 나갔다. 1907년 말에는 이인영(李寅榮)을 총대장으로 한 13도창의군의 서울진공 작전에도 참여하였다. 서울진공 작전 실패 이후에는 허위(許蔿)의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경기도와 강원도, 황해도 등지를 넘나들면서 일본군과의 전투를 전개해 나갔다. 하지만 허위가 1908년 체포되고 일본군의 탄압이 격화되자 소규모의 게릴라전으로 전환하여 파주(坡州)·적성(積城)·양주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정용대(鄭用大)·연기우(延基羽)·강기동(姜基東)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주로 경기도 일대의 일진회(一進會) 회원과 친일 관리들을 처벌하거나 일본군과 전투를 전개해 나갔다. 윤인순 의병장 휘하에 언제 참여하게 되었는지 불명확하다. 1909년 3월 17일 양주 북방 4리에서 일본군 삭령수비대(朔寧守備隊)와의 전투 중에 윤인순이 전사하자 강기동(姜基東) 의병장 휘하로 옮겨 활동을 이어갔다. 강기동은 서울 명동(明洞) 출신으로 대한제국의 기병부위(騎兵副尉)로 있다가 1907년 군대해산 이후 거의하여 의병활동을 전개해갔다. 강기동은 한때 일제 헌병대에 위장 귀순하여 경기도 장단(長湍) 등지에서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하며 의병부대에 정보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헌병보조원으로 있던 중 장단 헌병소에 붙잡혀 온 의병들과 함께 탈출하여 의병활동을 재개하였다. 이후 윤인순·정용대(鄭用大)·연기우(延起羽) 등 경기도 일대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게릴라전을 전개해 갔다. 강기동은 현상금 1,000냥이 걸렸을 정도로 일본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기도 했던 인물이다. 강기동 의병부대에서 주로 군자금을 조달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1910년 2월 동지 20명과 함께 경기도 포천군(抱川郡) 산내면(山內面) 산내리에 들어가 면장 윤모(尹某)씨로부터 90원의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또한 포천군 내동리(內洞里)에 들어가 이장 신모(辛某)씨 집에서 의복 10점을 수거하는 등 의병활동에 필요한 군자금과 군수품을 조달하는데 집중하였다. 주로 경기 포천 지역을 중심으로 군자금을 조달하다가 일본군에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0년 7월 18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강도로 징역 5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이후 행적은 확인할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홍동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