梁河淸
河淸1874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국민회
포상 정보
- · 애국장(2015)
관련 사건
- · 온성전투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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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2015) 함경북도 경흥군(慶興郡) 노서면(蘆西面) 굴포동(屈浦洞)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917년 당시 44세인 것으로 보아 1874년생으로 추정된다. 1897년 무렵 만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이며, 기독교인으로 기독교계 민족학교의 교감(敎監)을 맡기도 하였다. 만주 이주 후에는 지린성(吉林省) 훈춘현(琿春縣) 삼마동(三麻洞) 황구(黃溝)에 거주하였다. 1915년경에는 모, 처, 2남 4녀와 함께 거주하면서 농업에 종사하여 약 300여 원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조부 양춘길(梁春吉) 역시 이범윤(李範允)의 부하로서 1911년 북간도지역 한인단체의 임원을 역임하면서 배일사상을 고취한 독립 투사였다. 중국어에 능통하였고 때로는 변발을 하고 중국인으로 위장하기도 하여 중국인들과 관계가 양호하였다. 1910년경에 이범윤의 부하로 총기의 수급과 관리를 일찍부터 시행해왔으며, 1911년 5월경에는 북간도지역의 주요 독립단체인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의 평의원(評議員)을 역임하였다. 국민회는 1919년 무렵 이범윤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Q264준비해오던 한인 조직을 바탕으로 구춘선(具春先)·마진(馬晉) 등의 주도로 개신교·천주교·유교계열의 운동가들이 합류하여 결성되었는데, 대종교계열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와 북간도지역 양대 독립단체의 위상에 있었다. 이들은 홍범도(洪範圖)·안무(安武)·최진동(崔振東)을 규합하여 직할의 독립군단을 운영하였고, 또한 민정 운영을 통한 군자금의 모집과 식산흥업에 힘썼다. 이러한 국민회의 간부로서 춘화사(春華社) 지역에서 면회(面會)를 구성하여 12여 명의 거주 인원과 함께 생활하면서 비교적 부유한 형편을 꾸려나가면서 총기 등을 비축하였다. 또한 훈춘현 덕화향(德化鄕)에 위치한 중강서숙(中崗書塾)에서 재직하면서 교육자금 모집을 진행하며 기독교 정신 함양과 민족교육에 힘썼다. 1912년경에는 대별남구(大別南溝)에 위치한 송익준(宋翼俊)을 회장으로 하는 창의소(倡義所)의 간부로 활동하여 최진동 등과 함께 러시아 지역 한인과 중국, 러시아 혁명주의자들과의 협력에 힘썼다. 같은 해 3월에는 훈춘현 간도영사분관의 한인 순사보 김(金)씨를 구타-처단하였으며, 인근에서 여행 중인 신원불명의 한인이 첩자 행위의 용의가 있자 역시 처단하였다. 그 해 9월 1일에는 훈춘현 동문 내에 거주하는 친일 한인 김용태(金容泰) 부부를 처단하였다. 한편 중국인 무장단체와 함께 공동으로 국경을 넘나들면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13년에 8월경 밀정 처단 등의 행적이 중국당국에 발각되어 국자가(局子街) 지방의 중국 심판청(審判廳)에서 징역 10년을 받았으나 중국인들과 동료들의 탄원으로 수개월 후에 석방되었다. 1917년 11월 초에 주요 동료이자 상관인 황병길(黃炳吉)이 체포되자 위급을 느껴 러시아로 피신하였다가, 1917년 11월 4일에는 훈춘의 친일 단체인 훈춘공민회(琿春公民會)에 가입하고 이들을 통해 동월 5일 혼춘의 일본영사관에 출두하여 투항의 의사를 밝히고 자신의 행적을 자술하였다. 이는 황병길이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으나 일제의 집중된 감시와 의심을 피하기 위해 전술상 위장투항을 시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카인 양하귀(梁河龜)도 함께 투항시켜 의심을 피하고자 하였다. 1919년 5월경 북일학교(北一學校)에서 벌어진 한인 순사 상해 사건으로 조카 양하귀가 체포되자 이에 분개하여 일족과 함께 훈춘영사관의 관리를 살해하여 복수하려 한다는 풍설이 퍼지기도 하였다. 1919년 6~7월경에는 황병길과 의논하고 8월경에는 홍범도·최진동·구춘선 등 대한국민회 임원들뿐만 아니라 북로군정서의 서일(徐一)과 협의하여 결빙기에 국내로의 진공 작전을 벌일 것을 상의하고 동료들과 함께 국경지대를 중심으로 군자금모집을 진행하였다. 국내 진공 대상으로는 함북 온성군(穩城郡)을 지정하고 1920년 3월 15일에 활동을 개시하였다. 홍범도·최진동·서일 등이 이끄는 부대와 함께 풍리동·세선동으로 진입하여 일본군 주재소를 공격하여 격전을 벌이다가, 본인과 최진동이 이끄는 부대는 17~18일에 미포면 방면 특히 미점(美占)으로 진격하여 돌파구를 열어 일본군 헌병의 감시소와 주재소를 불태우고 주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적에게 투항하였던 채한석(蔡漢錫)·최봉길(崔鳳吉)이 독립군의 안내를 이끌었는데 이들의 배후로 최진동과 함께 거론되고 있었다. 이를 통해 1917년의 위장투항이 이들의 침투를 위한 기반이자 전술이었을 가능성을 가늠할 수 있다. 3월 18일에는 본격적으로 온성면소재지를 점령하고자 하였으나 일본군의 저항으로 3월 28일까지 전투가 지체되었고 온성면의 점령은 이루지 못한 채 퇴각하였다. 1921년 7월경에는 혼춘현 덕혜향(德惠鄕) 대황구(大荒溝)에 주둔하면서 병사들을 훈련시켰는데, 일왕의 사진을 표적으로 사격 연습을 할 정도로 배일의지를 불태웠다. 자료의 한계로 이후 행적은 확인할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배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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