劉成三
成三1897 ~ 1920. 8. 18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독립단
- · 독립의용단
포상 정보
- · 독립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95) 평안남도 강동군(江東郡) 삼등면(三登面) 하달리(下達里)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920년 활동 당시 나이가 23세로, 1897년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김희준(金凞俊)과 장비(張飛)라는 이명을 사용하였다.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과 독립의용단(獨立義勇團) 등의 단체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19년 (음)6월경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여순근(呂淳根)·표영준(表永俊)·주석환(朱錫煥)·이수영(李秀英) 등과 함께 서간도 안둥현(安東縣, 현 중국 랴오닝성 단둥시)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당시 콴뎬현(寬甸縣)에 설치되어 있던 기관과 협의하여 국내에서 활동할 계획을 수립하고, 같은 해 11월 표영준과 함께 귀국하면서 거사에 사용할 권총 여러 개를 반입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0년대 독립전쟁론을 독립운동 노선으로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1920년 1월 말 중국 상하이(上海)에서는 임시의정원 의장 손정도(孫貞道), 임시정부 교통부 차장 김철(金徹), 국무원 비서장 김립(金立), 재무부 차장 윤현진(尹顯振), 경무국장 김구(金九), 김순애(金淳愛) 등이 모여 의용단을 발기하였다. 임시정부의 연통제 시행과 연결된 의용단은 국내에 거점과 조직을 확보하고 의열투쟁과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조직된 의용단은 단장과 부단장을 중심으로 총무·서무부·군무부·장재부·서기로 이루어졌다. 1920년 4월 중순 총무이자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황해도 대의원인 김석황은 국내로 들어와, 도(道)에 지단(支團)과 면(面)에 분단(分團) 설립을 주도하였다. 김석황은 먼저 병을 가장하고 미국인이 경영하는 평양의 기홀병원(記笏病院)에 입원해, 조카인 김동선(金東宣)을 시작으로 단원들을 모집하였다. 1920년 6월 김송혁·김의창·주석환·표영준 등과 함께 의용단에 가입하였다. 군자금 모집과 의열투쟁을 표방한 의용단은 1920년 8월 미국의원단의 한국 방문을 계기로 일제기관 폭파하기로 하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무기운반이나 경고문 배포 등을 계획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8월 3일 평양 시내 곳곳에 민심을 선동하기 위해 표영준(表永俊)과 함께 「관공리의 퇴직을 명령함」·「정탐자에게 회개를 명함」·「자산가에게 독립자금 출연을 권고함」·「일반 국민에게 거의를 명령함」 등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 명의의 ‘최급경고문(最急警告文)’을 배포하였다. “시기가 절박하여 광복군총영은 우리의 큰 뜻을 표창(表彰)하여 일반 동포에게 최후의 기회를 주기 위해”라고 작성된 경고문을 통해 일제 기관의 관리에게는 퇴직, 밀정 등에게는 회개, 자산가에게는 군자금 출연, 일반 국민에게는 궐기 등을 요구하였다. 또한 일제 기관 폭파와 더불어 일제 경찰을 저격하는 활동도 전개하기로 한 계획에 따라, 8월 7일 밤 이광윤(李光潤)의 집에서 표영준과 함께 ‘제3부 자동차’에 타고 있는 경찰관을 처단하기로 논의하였다. 또한 8일 밤에는 실제 의거를 거행할 장소로 가서 실행 장소를 확인하고 거사방법에 대해 연구하였다. 그리고 9일 오후 9시경 계획대로 거사하기로 결정한 지점에서 지나가는 자동차를 향해 표영준과 함께 소지하고 있던 육혈포로 각각 총탄 3발과 4발을 발사하였다. 하지만 저격을 당한 자동차는 평남 제3부 경찰관의 자동차가 아니라 평안자동차 상회 소유의 자동차였다. 이 사건으로 운전수가 찰과상을 입고, 차체 4곳만 손상되었다. 의거 이후 은신하였다가, 8월 16일 평양부 신양리(新陽里)에서 동료의 오인사격으로 중상을 입었다. 이를 치료하기 위해 기홀병원에 입원하였지만, 2일만인 8월 18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조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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