劉明奎
明奎미상 ~ 1907. 9. 6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강화분견대
포상 정보
- · 독립장(1962)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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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62) 경기도 통진(通津, 현 경기도 김포시 통진읍)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유명계(劉明啓)라는 이명이 있다. 수원진위대(水原鎭衛隊) 강화분견대(江華分遣隊) 참교(參敎)로 근무하였다. 1907년 7월 30일 강화도에 거주하던 (前) 강화진위대 대장 이동휘(李東輝)가 배일사상을 고취하는 연설을 하고, 군대해산의 소식이 전해지자 강화지역에서 의병봉기의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었다. 같은 해 8월 2일 전등사(傳燈寺)에서 연기우(延基羽)·지홍윤(池弘允)·김동수(金東秀) 등과 밀의를 통해 의병 봉기를 계획하였다. 8월 8일 강화분견대에서 총기 유출과 탈영사건 등이 발생하자 강화 헌병대는 원래 계획한 8월 11일이 아닌 9일 강화분견대 해산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해산식에 참석한 후 소대장 부위(副尉) 민완식(閔完植)과 참위(參尉) 민영락(閔泳洛)에게 무기를 내어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당하였다. 병사였던 하정도(河正道)가 무기고를 습격하자 연기우 등 50여 명의 병사들과 이동휘 중심의 강화 주민 500여 명과 함께 무기고를 공격하여 무장하고 봉기하였다. 봉기 후 의병을 피해 도주한 강화군수이자 일진회 강화지부 총무인 정경수(鄭景洙)를 붙잡아서 강화성 동문 밖에서 처단하였다. 강화도를 장악한 후 일본군의 반격을 받았다. 1907년 8월 10일 진위대 일본인 교관 고쿠라(小倉) 대위는 기관총 2문으로 무장한 보병 1개 소대와 함께 갑곶(甲串)에 상륙을 시도하였다. 그러자 매복 공격으로 6명을 사살하고 8명을 부상시키는 전과를 올리고, 동문으로 후퇴하여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1907년 8월 11일 일본군은 기관총으로 위협을 하며 진위대를 점령하였고, 다음날인 12일 수색을 진행하면서 총기와 탄약을 모두 수거해오지 않으면 읍내를 모두 불태운다고 협박하여 많은 무기를 수거하였다. 이때 일본군의 공격으로 열세에 처하자 의병들과 함께 읍내를 탈출하였다. 그리고 무기의 열세로 전투에 어려움이 생기자 인근 통진으로 이동하여 무기와 탄약을 확보하다가, 1907년 9월 6일 붙잡혀 총살당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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