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기서
王基西1899. 7. 7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신흥무관학교
- · 대한독립청년단
- · 의용단
포상 정보
- · 애국장(201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15) 1899년 7월 7일 평안남도 대동군(大同郡) 시족면(柴足面) 남경리(南京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왕한성(王漢成)을 사용하였다. 만주로 이주한 시기는 확인할 수 없으나, 1919년 7월경 중국 지린성(吉林省) 류허현(柳河縣) 고산자(孤山子)에 위치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 입교하여 광한단(光韓團) 단원과 함께 활동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신민회(新民會) 소속 이회영(李會榮)·이시영(李始榮)·이철영(李哲榮) 형제 등이 이상룡(李相龍) 등이 국권상실의 와중에 해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계획하고 1911년 6월에 길림성 류허현 추가가(鄒家街)에 신흥강습소로 설립되었다. 이장녕(李章寧)·이동녕(李東寧) 등 구 대한제국 출신의 군인들을 초빙하여 보통교육·군사교육·농업활동을 병행하는 민족교육기관이었다. 이후 합니하(哈泥河)로 학교를 옳긴 후 교사의 증축, 분교의 개설 등으로 규모를 확장하였으며, 또한 일본군에서 탈출한 지청천(池靑天) 등을 교관으로 초빙함으로써 군사교육의 질적 수준을 높여나갔다. 1919년 7월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활동 중, 지청천으로부터 군자금과 단원 모집의 명을 받고 1919년 8월 하순 랴오닝성(遼寧省) 안둥현(安東縣)으로 이동하여 만주지역에서의 활동을 진행 중에 역시 무관학교 생도인 엄우룡(嚴雨龍)·김봉원(金鳳源)·윤세주(尹世冑)를 만나 국내로 들어가 평양(平壤)을 중심으로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기로 협의하였다. 국내로 들어가 상하이(上海)에 본거지를 둔 의용단(義勇團)의 김순록(金淳祿)·김봉섭(金鳳燮)·정석흥(丁錫興),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의 김국민(金國敏),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의 박원국(朴元國)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동료들과 함께 1920년 11월에는 평남 대동군 시족면 운곡리(雲谷里)에서 30원을, 같은 달 30일에는 동일 지역에서 군자금 징수에 나섰으나 소란이 벌어져 급히 도피하였고, 같은 해 12월 25일에는 평남 강동군(江東郡) 원탄면(元灘面) 마산리(馬山里)에서 500원의 자금 모집을 목적으로 하였으나 후일을 기약하고 물러나기도 하였다. 1921년 1월 27일에는 김봉섭과 함께 강동군 고천면(高泉面) 동서리(東西里)에서 140원을 징수하였으며, 1921년 8월에는 김형관(金炯寬), 최승락(崔承樂)과 함께 용강군(龍岡郡) 다미면(多美面) 서적리(瑞赤里)에서 군자금을 징수하였다. 1921년 9월 16일 군자금 모집단이 대동군 율리면(栗里面) 동창리(東倉里)에 은거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일제 경찰은 이를 급히 습격하여 교전을 개시하였다. 이에 허영진(許永鎭)이 전사하고 일부 인원은 은닉, 변장 후 탈출하였으나 그럼에도 김국민·김순록·김봉섭 등 20여 명의 동료가 체포되었다. 이 와중에 동료들과 함께 있다가 탈출하고자 하였으나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재판 중에서도 “우리가 군자금을 강탈한 것이 아니오, 조선인이 된 이상 독립운동에 군자금을 제공할 의무가 있는 것”이라며 당당한 입장을 견지하다가, 1921년 11월 4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을 받고 옥고를 겪던 중 1928년 3월 31일에 풀려났다. 이후 행적은 확인할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배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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