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현경
吳玄卿1878. 3. 7 ~ 1972. 5. 28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1)
관련 사건
- · 해주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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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1) 1878년 3월 7일 황해도 해주군(海州郡) 해주면(海州面) 남행동(南幸洞)에서 태어났다. 1914년 미국 감리회 조선연회에 입회하였으며, 전도사로 연백 지방에서 일하다가 1918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9년 당시 해주면 남본정(南本町)에 위치한 예수교회 목사로 재직하고 있었으며, 해주면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2월 20일 오후, 민족대표 박희도(朴熙道)와 최성모(崔聖模)는 김명신(金明信)을 통해 독립선언서 300장과 최성모의 서신을 해주군의 개신교인들에게 전달하도록 하였다. 이때 김명신으로부터 독립선언서와 최성모의 서신을 받았다. 이어 남행정(南幸町)에 위치한 본인의 집에서 황학소(黃鶴巢)·임용하(林容夏)·이동혁(李東赫)·최명현(崔明鉉)·김창현(金昌鉉) 등과 만나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일을 계획하였다. 나아가 그들과 함께 3월 1일 예배당에서 고종의 봉도식(奉悼式)과 함께 선언서 낭독식을 거행하고 독립선언서를 배포할 계획을 세웠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경 남본정에 위치한 예배당에는 170여 명의 개신교 신자들이 모였다. 예배당에서 고종 봉도식을 마친 후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하였다. 이어 예배당에 모인 신자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주면서 한국이 독립을 선언한 사실을 널리 알리도록 독려하였다. 그 날 이후 해주군 각 지역에서는 만세시위가 준비되었다. 3월 9일에는 해주면 남욱정(南旭町) 장터에서 봉영화(奉永華)·최봉직(崔奉稷)·정만기(鄭萬基)·이명수(李明洙)·이인규(李麟珪)·김석만(金錫萬)·최병한(崔丙漢) 등이 주도하는 만세시위가 계획되어 있었다. 기독교인들과 학생들이 만세시위 참여를 독려하였으나, 3월 8일 만세시위 소식을 탐지한 일제 군경이 시위 주도자들을 사전에 붙잡으면서 만세시위는 실행되지 못하였다. 일제 군경의 감시 속에서도 3월 9일 석동면(席洞面) 서원리(書阮里), 3월 10일 서변면(西邊面), 3월 12일 추화면(秋花面) 약현리(藥峴里), 그리고 3월 17일 청룡면(靑龍面) 영양리(迎陽里)에서 만세시위가 잇달아 일어났다. 만세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던 3월 말을 전후로 해주면을 비롯해서 해주군 각 지역에서 만세시위가 재개되었다. 이후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삼창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일제 경찰에 붙잡혀 조사를 받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해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으며, 1919년 8월 18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출옥 이후 서울 번리교회에서 시무하면서 협성신학교를 졸업한 후 여주와 해주 등에서 목회활동을 하였다. 1936년에는 장로교와 감리교의 선교 구역 분담이 철폐되자 장로교로 이적하였다. 6·25전쟁 당시인 1951년 1·4 후퇴 직전 납북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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