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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화중

安華重

1882. 7. 27 ~ 1921.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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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안화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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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동래(東萊)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동래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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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14)

관련 사건

  • · 구포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14) 1882년 7월 27일 경상남도(慶尙南道) 동래군(東萊郡) 구포면(龜浦面) 금곡리(金谷里, 현 부산광역시 북구 금곡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구포면 면사무소(面事務所)에서 소사(小使)로 근무했고, 3월 29일 동래군 구포면 구포시장에서 거행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구포 사람으로 당시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에 다니던 양봉근(楊奉根)은 고향인 구포로 내려와 구포면 화명리(華明里)에 살고 있던 구포면 서기(書記) 임봉래(林鳳來)에게 서울·평양의 만세운동 소식과 독립선언서를 전하면서 구포에서도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에 임봉래는 윤경(尹涇)·유기호(柳基護)와 함께 구포지역의 청년 및 유지들을 모아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였다. 3월 27~28일 2일 동안 임봉래·유기호·김옥겸(金玉兼)·김윤길(金潤吉)·허정(許楨)·김용이(金用伊)·최종호(催宗鎬)·유진영(兪鎭榮)·윤대근(尹大根) 등은 구포면 구포리에 있는 박영초(朴永初)·이수련(李守連) 집에 모여 만세운동에 대한 회의를 거듭한 결과 3월 29일 구포 장날을 이용하여 구포시장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들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수백 장씩 만들었다. 또한 구포시장 만세운동에 함께 할 동지들을 규합하기 위해 지역의 청년유지들에게 합류를 요청하였다. 이때 박덕홍(朴德弘)·손진태(孫晉泰)·김장학(金章鶴)·이몽석(李夢石)·양대용(梁大溶)·김영길(金永吉)·정치호(鄭致浩)·권용학(權龍鶴)·허희중(許希中) 등과 함께 구포시장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결의하였다. 3월 29일 구포 장날 준비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비밀리에 나눠 받은 후, 정오가 되자 구포시장 상인 1,000여 명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선두에 서서 시위대를 지휘하며 구포시장 상인들에게 폐점(閉店)하도록 독려하였다. 구포시장의 만세시위가 점차 확산하여 간다는 소식을 들은 일제는 군경들을 출동시켰다.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구포시장으로 진입한 일제 군경은 김옥겸(金玉兼) 외 11명을 현장에서 체포한 후 구포주재소로 끌고 가 구금시켰다. 1,200여 명에 달하는 시위 군중들과 함께 동지들을 구출하기 위해 주재소로 이동하였다. 오후 3시경 주재소에 도착한 후 시위대와 함께 주재소 유리창, 의자, 판벽 등의 기물을 파괴하고 내부로 진입하여 동지들을 구출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주재소를 방어하던 순사 미우라 료헤이(三浦良平)과 순사보 김순섭(金順涉), 부산 헌병분대로부터 지원이 온 헌병 2명에게 부상을 입히는 등 격렬한 혈전이 이어졌다. 시위대의 공격이 거세지자 일제 군경들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격을 가하였고, 그 결과 9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일제 군경의 압도적인 화력으로 인해 시위대는 어쩔 수 없이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일제 군경은 구포시장 만세운동의 주도 인물 42명을 검거하였는데, 이때 다른 동지들과 함께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7월 16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4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노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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