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규
劉泳奎1888. 5. 1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독립자유회
- · 대한독립군비단
- · 국민부
포상 정보
- · 애국장(201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10) 1888년 5월 1일 평안북도 영변군(寧邊郡) 용산면(龍山面) 운봉리(雲峯里)에서 태어났다. 영변에서 대한독립자유회(大韓獨立自由會, 조선독립자유회)를 조직하고 총무로 활동하였으며,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과 국민부(國民府)에서도 활동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8개월간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 집으로 돌아와 있던 1920년 (음)8월 상하이(上海)의 임시정부 산하 군사 기관인 대한독립군비단 단원 김기영(金基永)이 찾아와 함께 독립운동을 할 것과 독립운동단체 자유회(自由會)를 설치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처음에는 자격이 없다고 사양하였으나, 김기영이 “국제연맹에서 전세계의 압박받는 민족을 전부 해산하는 이때 우리 조선인도 좋은 기회를 잃지 않아야 한다”고 다시 한 번 설득하자 승낙하였다. 영변·덕천 지방의 한학자 10여 명에게 김기영에게 받은 ‘자유규칙서(自由規則書)’를 보여주며 대한독립자유회를 조직할 것을 권유하였으며, 응낙을 받아내었다. 대한독립자유회에서 ‘독립은 한국 사람의 자유이니 한국 민족이 활동하면 이룰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였다. 1921년 4월경 대한독립자유회의 회원 수는 70여 명에 달하였다. 총무가 되어 임시정부, 광복단(光復團) 등과 연락을 주고받았으며, ‘국권회복론(國權回復論)’이라는 제목의 책자를 인쇄하여 각지에 배포하였다. 또한 동지들과 함께 권총으로 무장하고 평북 일대에서 16차례에 걸쳐 군자금을 모금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이 일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만주로 급히 피신하였으며, 중국 지린성(吉林省) 창바이현(長白縣)의 대한독립군비단에 가입하였다. 1921년 7월 대한독립군비단 단원 김문선(金文善)과 함께 평남으로 돌아왔다. 평남 개천군(价川郡) 일대에서 양봉엽(梁鳳燁) 등 3명에게 독립운동을 권유하여 대한독립자유회 회원으로 확보하기도 하였다. 일제 경찰에 검거된 대한독립자유회 회원들이 심한 고초를 당한 뒤 조직이 거의 해체 상태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은 후, 같은 해 9월 시천교(侍天敎) 지부장 박병양(朴丙陽)을 만나 대한독립자유회 재건을 위한 협조를 구하려 하였다. 1만 3천여 명에 이르는 덕천 지방의 시천교 신자들을 대한독립자유회 회원으로 모집하고, 이들을 임시정부에 소속시킬 계획이었다. 그러나 구체적 계획을 시행하기 전에 평남 덕천경찰서에 붙잡혔다. 1921년 10월 29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5년을 받았다. 항소하였으나, 1922년 1월 31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재차 상고하였으나, 1922년 3월 18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에도 독립을 위한 활동을 지속하였다. 1932년 10월 국민부에 가입하였다. 같은 해 12월 23일 국민부원 변낙규(邊洛奎)·김일봉(金一鳳)·장인준(張仁浚)과 함께 영변·덕천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을 위한 결사를 조직하고 활동을 전개하던 중, 1933년 2월 덕천경찰서에 붙잡혔다. 같은 해 3월 평양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및 강도죄로 징역 5년을 받았다.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를 제기하였으나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이정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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