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석
姜海錫1904. 1. 18 ~ 1973. 4. 2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5)
관련 사건
- · 이경채 사건
- · 광주학생독립운동
- · 고려공산청년회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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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5) 1904년 1월 18일 전라남도 광주군(光州郡) 광주면(光州面) 계림리(鷄林里)에서 100여 두락의 농사를 지으며 담뱃대 제조 공장을 경영하던 강호일(姜浩一)의 7남 4녀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형인 석봉(錫峰)과 동생 영석(永錫)·석원(錫元)도 민족운동에 나섰고, 부인 김홍은(金洪恩)과 제수 신경애(申敬愛)도 여성운동에 앞장선 광주 지역의 대표적인 민족운동 가문 출신이다. 1910년대 광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임시 교원양성소를 수료하였다. 이후 1920년대 중반 송정리 보통학교와 광주청년학원 교사로 재직하며 민족운동을 펼쳤다. 1925년 광주청년회(光州靑年會) 집행위원에 선임되었으며, 서울파 계열의 사회주의 사상 단체인 신우회(新友會)의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에는 광주철공조합 집행위원, 전남노동연맹(全南勞動聯盟) 발기준비위원에 선임되었다. 1927년 말 조선청년총동맹의 지역 단일 청년동맹 결성 등 신지도 방침에 따라 김재명(金在明)·장석천(張錫天) 등과 함께 광주청년동맹(光州靑年同盟) 창립준비위원에 선임되어 동맹의 설립을 주도하였다. 각지를 순회하며 강연을 통해 청년운동 조직 결성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등 청년운동의 확산을 위해 노력하였다. 광주·전남 지역의 청년 노동운동에 힘쓰는 한편 청년·학생의 지도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농업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비밀결사 성진회(醒進會)가 1927년 3월경 해산하자, 중심 인물들을 불러 향후 운동 방향에 대해 지도하는 등 학생들에게도 깊은 신망을 얻고 있었다. 1927년 3월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에 입당하여 광주 야체이카로 활동하였으며, 동년 12월 신간회(新幹會) 광주지회의 간사로 선임되었다. 1928년 1월 전남청년연맹(全南靑年聯盟) 상무집행위원에 선임되어 조직 운영을 주도하였다. 한편, 이해 2월 성진회의 뒤를 이어 광주 지역의 각 중등학교에서 지속되던 사회과학 연구 모임의 결속에 힘썼다. 동지인 지용수(池龍洙)의 집에서 광주고보 광주농업학교 전남사범학교 사회과학 연구 모임의 주도 인물들을 규합하여 상호 연계하여 활동할 것, 후계자를 양성할 것 등 운동 방안을 지도하였다. 이러한 지도는 광주 지역 중등학교의 사회과학 연구 모임이 지속해서 활동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또한, 자신의 집에 하숙하는 광주농업학교와 사범학교 학생들의 교류를 주선하기도 하였다. 동년 4월에는 광주고보 5학년생 이경채(李景采)가 항일 격문을 각지에 우송한 사건에 연루되어 한길상(韓吉祥) 등과 함께 일제에 체포되었다. 동년 7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으로 예심을 받았으나 면소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다. 1928년 8월 고려공산청년회 활동으로 다시 체포되어 1929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았다. 1930년에는 광주학생운동으로 인해 성진회 등 중등학교 사회과학 연구 모임을 지도한 사실이 발각되어 징역 1년을 가형(加刑)받아 옥고를 겪고 1932년 8월 출옥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전남지부 부위원장, 학무부장을 역임하였다. 1946년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 결성대회에 농민조합전국총동맹 대의원의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1973년 4월 25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정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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