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휘
安在輝1894. 8. 10 ~ 1961. 9. 21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함안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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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4년 8월 10일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여항면(艅航面) 외암리(外岩里)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인필(仁弼), 호(號)는 고봉(高峰)이다. 이명으로 안교흠(安敎欽)을 사용했다. 한학 교육을 받았으며, 함안 지역의 강한 유림적 전통의 영향을 받아 민족의식이 강했다. 함께 함안 읍내 만세운동을 주도한 안재형(安在瑩)·안재원(安在遠) 등과 사촌 지간이었다. 1919년 고종의 국상 소식을 접하고 조한휘(趙漢輝)·한종순(韓鍾淳)·이찬영(李讚榮)·조병흠(趙丙欽)·조문국(趙文國) 등 함안 지역 인사들과 함께 상경하여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목격하였다. 그리고 3월 5일 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지참하고 돌아온 즉시, 함안 지역에서의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거사일은 함안읍 장날인 3월 19일로 정하고, 태극기 제작과 독립선언서 등사 등의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다. 1919년 3월 19일 오후 1시, 비봉산(飛鳳山)에서 고천제(告天祭)를 거행하는 것으로 함안의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이후 읍내 태평루(太平樓)에 대형 태극기를 게양한 후, 또 다른 주도자로 동명학교(東明學校) 교사인 이희석(李喜錫)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이것을 신호로 일거에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만세시위 군중은 삽시간에 3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사촌형인 안재형·안재원과 함께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가하였다. 만세시위는 투석전을 전개하며 함안경찰관주재소를 6회에 걸쳐 습격하고, 등기소 등 식민지 행정기관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양상을 보였다. 일제 군경에 의한 폭력적 진압과 시위 참가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일었다. 시위 주도자와 참가자에 대한 체포는 다음날인 3월 20일까지 이어졌는데, 검거된 사람들 중 63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때 주도자로 붙잡혔다. 함안경찰관주재소에 돌을 던져서 기물을 파괴하고, 등기소에 난입하여 폭행을 자행했다는 이유로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19년 8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항소가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에는 함안 지역 항일 민족운동의 주요 인물로 활약하였다. 1920년 7월 30일, 창립된 함안청년회에서 임원진에 이름을 올렸고, 사회부장을 맡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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