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의중
安懿仲1881. 5. 9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11)
관련 사건
- · 대구 서문시장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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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포장(2011) 1881년 5월 9일 경상북도 예천군(醴泉郡) 유천면(柳川面) 죽암동(竹岩洞)에서 태어났다. 이후 달성군(達城郡) 달서면(達西面) 내당동(內塘洞, 현 대구시 서구 내당동)으로 이주하였으며, 병원 소사로 근무하였다. 1919년 3월 8일 대구 서문(西門)시장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혀 옥고를 겪었다. 대구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은 대구부 남성정(南城町)의 기독교회 목사 이만집(李萬集)이었다. 이만집은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다음날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 이용상(李容祥)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으면서 대구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심하였다. 이만집은 같은 교회 조사(助師) 김태련(金兌鍊)과 계성학교(啓聖學校, 현 계성중·고등학교) 교사 김영서(金永瑞) 등을 만나서 3월 8일 장날을 이용하여 서문 밖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협의하였다. 김태련은 자신의 집에서 독립선언서 백여 장을 인쇄하고 태극기 40여 장을 제작하였다. 이만집과 김태련 등은 기독교인들을 규합하고, 계성학교 교사인 김영서와 백남채 등은 학생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만세운동을 함께 하기로 하였다. 계성학교 외에도 신명여학교(信明女學校), 대구고등보통학교(大邱高等普通學校)와 성경학교(聖經學校) 학생들이 비밀리에 회합을 가지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만세운동에 참여하기로 하였다. 거사 당일인 3월 8일, 이만집과 김태련 등 기독교 인사들이 먼저 장터에 도착하였고, 이어서 수업을 마친 계성학교, 신명여학교 등의 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서문 시장에 모이기 시작하였다. 오후 3시경 학생들은 독립선언서를 장터에 모인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고 태극기를 흔들었다. 총책임자 이만집과 김태련은 쌀가마로 만든 단상 위에 올라가 독립선언서 낭독과 독립만세를 부르기 위하여 올라갔다. 그러나 김태련이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하려고 할 때 일제 기마 헌병들이 이들을 저지하기 위하여 달려오자 낭독을 멈추고, 이만집의 ‘대한독립만세’ 선창에 학생들과 군중들은 ‘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이때 장터에 나와 있다가 이 모습을 보고 소리 높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만집과 김태련 등 주도자들은 독립만세를 부르며 군중들을 이끌었고 기독교인, 학생, 주민, 장꾼 등 1,000여 명의 시위대가 행진을 하였다. 만세 행렬은 파출소를 지나 대구경찰서, 경정통(京丁通)을 통과하여 동성로(東城路)로 접어들었다. 달성군청 앞에 이르렀을 때 일본군 보병 제80연대가 기관총을 앞세우며 시위 군중을 막았고, 뒤에는 일제 경찰이 총칼로 무장하고 있었다. 만세 군중들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서 일제 경찰의 무자비한 탄압이 이어졌고 이때 현장에서 붙잡혔으며, 이날 157명이 검거되었다.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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