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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승우

安承禹

1865 ~ 1896.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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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안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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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지평(砥平)의병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지평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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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유인석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독립장(1962)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2) 1865년 경기도 지평군(砥平郡; 현 양평군 지평면)에서 아버지 안종응(安鍾應)과 어머니는 덕수 이씨(德水) (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자는 계현(繼賢), 호는 하사(下沙)이다. 대대로 지평 상석리(砥平 上石里)에서 살았다. 초년에 과거 공부를 하였으나, 부친 안종응(安鍾應)으로부터 “네가 아버지를 섬길 줄도 모르는데 어떻게 임금님을 섬길 줄 알겠느냐”라는 말을 듣고 금계(錦溪) 이근원(李根元)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으며, 이어서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부친의 명으로 유중교를 찾아뵙고 나서 “위정척사와 화이인수(華夷人獸)의 구별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 몸과 마음이 멍하여 살 길을 구한 것 같고 침식을 잊기에 이르렀다”라고 할 정도로 유중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1894년 6월 일본군에 의해 경복궁이 점령당한 갑오변란의 소식을 듣고 의병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으나 호응하는 이가 없어 중지하였다. 1895년 3월 공포된 을미변복령(乙未變服令)으로 의복의 색이 백색에서 흑색으로 변하게 됨을 통탄하였다. 1895년 8월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이어서 그 해 11월에 단발령이 공포되었다. 이와 같은 일본제국주의 침략과 그에 영합한 개화파 관리들에 의한 일련의 개화정책을 망국행위로 단정한 보수 유림들은 대응책을 수립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5백년을 내려 온 우리 임금의 종묘사직이 지금에 와서 망했는데 우리가 이 일을 어찌해야 한단 말이냐”며 통분하였다. 이러한 사태에 이르자 화서학파를 이끌던 유인석(柳麟錫)은 문인들을 장담에 소집하였다. 유인석은 “장수란 전쟁에서 죽고, 마부란 말고삐 아래 죽는 것이니, 선왕의 도를 지키다 죽는 것이 선비의 일이다”라고 말하면서 변란에 처하여 취할 수 있는 3가지 방책인 ‘처변삼사(處變三事)’를 제시하였다. 유인석의 가르침을 받고 의병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고향인 지평으로 돌아가 의병 결성을 추진하였다. 부친 안종응은 이미 약간의 무기를 준비해 놓고 이춘영(李春永)과 의병 봉기를 추진 중이었다. 이춘영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안종응의 소개로 지평의 포군장(砲軍長) 김백선(金伯先)이 4백여 명의 포군을 이끌고 의병에 합류하였다. 이범직(李範稷) 등에게 연락하여 의병에 나서게 함으로 드디어 지평의병은 결성되었다. 의병대는 원주(原州)의 안창(安昌)(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에 집결하여 창의를 선포하고 원주관아를 공격, 점령하였다. 이때 의병의 군세는 약 1천여 명에 달하였다. 원주군수는 충주(忠州)로 도망갔으며 충주관찰사는 정부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정부에서는 1월 19일 내부협판(內部協辦) 유세남을 파견하는 동시에 친위대 1개 중대를 원주로 출병시켰다. 가흥(可興)(현 충주시 중앙탑면)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병참수비대에서도 1월 17일 5명의 정찰병을 원주로 파견하였다. 지평의병은 1896년 1월 17일 제천(堤川)에 무혈 입성하였다. 제천군수는 의병의 기세에 눌려 성을 버리고 도망갔다. 이때 서상렬(徐相烈)이 동문인 이필희(李弼熙)·오인영(吳寅泳)·배시강(裵是綱) 등과 가세하였다. 이들이 합세한 뒤 지평의병은 대장에 이필희를 추대하고 본격적인 항전에 돌입하였다. 이때 군사 소모를 담당한 군무도유사(軍務都有司)가 되었으며, 이춘영은 중군, 서상렬은 군사를 맡았다. 지평의병은 1896년 1월 19일 단양(丹陽)으로 진군하여 군수 권숙(權潚)을 구금시켰다. 같은 해 1월 22일에는 단양의 장회협(長匯峽)에서 관군과의 제1차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친위대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그 전날인 1월 21일 1개 기병(枝兵)을 거느리고 제천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관군과 일본군의 계속된 공격으로 의병대는 죽령을 넘어 안동(安東)지역으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천의 본진에 남아있었는데 도망갔던 제천 군수를 대신하여 신임 군수로 임명된 정영원(鄭英源)이 관군을 이끌고 제천에 들어왔다. 이에 부득이 지곡(芝谷)(현 제천시 수산면 지곡리)으로 이진(移陣)하였다가, 그날 밤에 영월(寧越) 주천(酒泉)(현 영월군 주천면)으로 다시 부대를 옮겼다. 유인석은 지평의 단양 전투와 영월로의 퇴군 소식을 듣고 중국으로의 망명을 포기하고 가족을 피신시킨 뒤 제자들을 보내 영월로 모이게 하였다. 1895년 12월 영월로 들어간 유인석은 문인들에 의해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의병대는 제천으로 들어가 대장소를 차리고 이춘영을 중군장(中軍長)에 임명하는 등 제천의병을 조직하였다. 이때 전군장(全軍長)을 맡았다. 제천의병은 1896년 2월 15일 친일 관리로 단발을 강요했던 단양군수 권숙과 청풍(淸風)(현 제천시 일대)군수 서상기(徐相耆)를 처형하였다. 그 해 2월 17일에는 충주성을 공격, 점령하고 관찰사 김규식(金奎軾)을 체포, 처단하였다. 이후 제천의병은 수안보(水安堡)와 가흥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격퇴를 주요 목표로 삼아 작전을 폈다. 의병대는 수안보의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여 격퇴시키는 등 군세를 떨쳤다. 그러나 2월 26일 수안보의 일본군 병참부대를 공격하던 중군장 이춘영이 전사하고 이어 2월 28일의 충주성 공방전에서는 주용규(朱庸奎)가 전사하는 등 의병 측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 1896년 3월 5일에는 일본군의 집중적인 공격으로 의병대는 다수의 희생자를 낸 채 충주성을 포기하고 제천으로 후퇴하였다. 제천에서 중군장에 임명되어 병력을 결집시키고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3월 27일 선봉장 김백선의 처형사건이 일어났다. 김백선은 제천의병의 선봉장으로 많은 공을 세운 바 있다. 김백선이 이끄는 부대가 3월 27일 가흥전투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괴멸시키고 진지를 공격할 때 본부에 요청한 원군이 오지 않아 점령에 실패하고 회진하였다. 이때 원군을 보내지 않은 것을 탓하며 중군장에 대항하는 등 군기를 문란 시켰다는 것이 김백선을 처형한 죄목이었다. 김백선 처형은 의병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의병부대를 동요시켰다. 이때 군사 훈련과 소모 활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의병을 해산하라는 선유(宣諭) 조칙이 내려왔으나 이를 적극 반대하였다. 그러나 제천의병은 점차 수세에 몰렸다. 관군과 일본군이 이천(利川)의병이 웅거하고 있던 남한산성을 함락하고 나서 그 여세를 몰아 제천의병을 공격 목표로 삼고 제천으로 몰려든 것이다. 관군과 일본군은 1896년 5월 23일부터 제천의병을 공격하였다. 다음날인 24일부터 비가 와서 의병은 주 무기인 화승총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그 다음날인 5월 25일 비장한 결심을 하고 새로 쌓은 남산성에서 싸움을 독려하여 손수 화약을 재어 군사들에게 주면서 격려하였다. 의병의 사기는 다시 충천하였으나 바람의 방향이 불리하게 되어갔으며, 설상가상으로 폭우가 내렸다. 의병의 무기는 무용지물이 되었는데 적의 총탄은 비 오듯이 쏟아졌다. 이에 돌을 던지며 대항하다가 분을 참지 못하고 “창의 중군 안승우는 여기에 있다. 너희들이 나를 죽이려면 빨리 오너라”고 외치고 항전하다가 적의 탄환에 사망하였다. 나머지 의병들은 다 흩어지고 유독 제자로서 종사(從事)로 활약하던 19세의 청년 홍사구(洪思九)가 함께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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