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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원규

安元奎

1877. 8. 30 ~ 1947.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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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안원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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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파주(坡州)미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파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와이파후공동회
  • · 한인합성협회
  • · 대한인국민회
  • · 대한공진단
  • · 국민군단
  • · 하와이교민단
  • · 재미한족연합위원회
  • · 주미외교위원회

포상 정보

  • · 독립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95) 1877년 8월 30일 경기도 파주군(坡州郡) 임진면(臨津面) 문산리(文山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안문학(安文岳)과 어머니 정씨의 2남 1녀 중 장남이다. 1903년 미국 하와이로 노동이민을 가 감리교 전도사로 활동하였다. 1906년 3월 10일 하와이(Hawaii) 오하우지방의 와이파후 농장에서 공동회(共同會)를 조직하였다. 와이파후공동회는 국내의 반일애국운동이 한창이던 당시 오하우지방의 사탕수수농장에서 일하고 있던 초기 하와이 1세대들을 중심으로 결성한 애국계몽운동 단체이다. 주로 어려움이 처했을 때 서로 돕고 반일운동의 일환으로 일본물품 배척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때 회장으로 선임되어 한인 동포들의 자치 생활을 지도하고 항일 운동을 이끌었다. 1903년 이후 정치색을 띤 독립운동단체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하와이 각 지방에는 1907년 경 20여개 이상의 단체들이 난립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06년 2월 15일 재미 한인들은 미국 본토와 하와이의 한인들을 하나로 모아 항일공동전선을 구축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자신 해산 후 조직적이고 총괄적인 항일민족운동을 위한 합동운동을 전개하면서 1907년 9월 2일, 24개의 한인 단체 대표 30명이 호놀룰루(Honolulu)에 모여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를 조직하였다. 한인합성협회는 4개조의 합동결의안을 채택하였는데 네 번째 조항으로 기관지 『합성신보』를 발간하기로 하였다. 기존 각 단체들이 발행하던 회보들을 『합성신보』로 통합하여 실력을 집중하고 언론을 일치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부회장으로 선임되어 한인들의 권익 향상과 일상적 안녕을 보장하고 민족교육을 장려하면서 항일 운동을 주도하였다. 조직 후 1년여 동안 47개 지역에 지회가 설립되어 천여 명이 넘는 회원이 가입할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갔다. 1908년에는 장인환(張仁煥)·전명운(田明雲)에 의한 친일미국인 스티븐스(D. W. Stevens) 저격 의거를 계기로 재미한인단체들은 재차 통합운동을 추진하였다. 미주 전역을 통할하는 유일한 한인민족운동단체를 조직하기 위해 미주 본토의 공립협회(共立協會)와 하와이 한인합성협회의 통합이 논의되었다. 이때 한인합성협회 발기인 중 한 사람으로 논의에 참여하여 1909년 2월 국민회(國民會)가 통합 창립되었다. 이듬해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까지 국민회와 합동하면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가 출범하였다. 대한인국민회는 샌프란시스코에 중앙총회를 두고, 북미지방총회와 하와이 지방총회로 조직 구성을 갖추었다. 1909년 2월 하와이 지방총회 부회장을 역임하였으며, 1910년 4월에는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를 이끌었다. 1910년 일제의 한국 강점이 현실화 되자, 7월경 하와이 각 지방 대표자들을 호놀룰루에 소집시켜 대동공진단(大同共進團)을 조직하였다. 대동공진단은 하와이에서 무예연습과 군사훈련을 통해 군인을 양성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각 지방에 독립군양성소를 설립하고 군사를 양성하기 위한 사업을 추진하여 대동공진단이 무장항일운동을 이끌어가는 중추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때 대동공진단의 재무로 선임되어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와 함께 일왕에게 한국 강점을 강력히 반대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발송하였다. 1914년 6월 하와이 대한인국민회가 무장항일투쟁을 위해 준비하던 연무부(演武部) 사업을 후원하기 위해 박종수(朴種洙)와 함께 하와이 오아후 가할루 지방에 있던 약 1,500에이커의 파인애플 농장을 기부하였다. 이에 박용만(朴容萬)을 단장으로 하여 대조선국민군단(大朝鮮國民軍團)이 창립될 수 있었다. 대조선국민군단은 항일무장투쟁을 대비하여 독립군 부대의 지휘관 양성을 위한 군사 교육 단체로서 기능하였다. 1915년부터 하와이 한인 단체들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노력하던 이승만(李承晩)이 1921년 3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를 해산시켰다. 이어 1922년 3월 22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거류민단령(臨時居留民團令)을 따라 하와이 대한인교민단을 조직하였는데 이때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부회장으로서 하와이 각지에 지부를 설치하고 한인사회 통합을 위해 힘을 쏟았다. 대한인교민단은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에 예속되어 이승만의 지도를 따라 임시정부에 보내는 군자금인 인구세(人口稅)도 구미위원부로 보냈다. 1922년 6월 17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이승만 내각에 대한 불신임안을 통과시키자 이에 대한 항의서를 발송하고 1925년 3월 의정원에서 이승만의 탄핵안을 통과시켰을 때에는 임시정부에 반대하였다. 하지만 1929년 11월 국내에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고 일본의 침략정책이 가혹해지자 다시 임시정부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1933년 1월 하와이 대한인교민단이 해체되고 하와이에 대한인국민회가 재건되었다. 1936년 1월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부회장으로 선출되어 분열된 한인사회를 수습하고 조직을 효율적으로 이끌어 나가기 위해 여러 활동에나섰다. 우선 국민부담금제도를 통해 대한인국민회의 채무를 청산하였고, 혈성금제도를 실시하여 임시정부의 경상비를 조달하였다. 또한 노인 동포의 노후를 위하여 호상부제도를 실시하는 등 한인들의 자치를 위한 제도들을 만들어 나갔다. 1939년에 들어서자 중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의 기운이 고조되고, 중국 내 한인 독립운동단체인 광복진선(光復陣線)과 민족전선(民族戰線)이 하나로 통합하는 등 큰 변화들이 일어났다. 이에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는 1940년 9월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와 동지회 등의 대표자들이 모여 시국 대책을 강구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따라 1941년 4월 20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주 지역 한인 단체 대표들이 모여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대표로 참석하였는데 대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의장으로서 선언문과 해외한족대회 결의안을 작성하고, 독립전선 통일문제, 임시정부의 봉대(奉戴)문제, 대미외교기관(對美外交機關)의 설치문제, 군사운동에 관한 문제, 미국 국방공작 후원문제, 연합기관 설치문제, 독립금 수봉문제 등 여러 사안을 결의하였다. 이러한 결의에 따라서 8월 미주 지역 모든 단체들의 통합기관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가 조직되고 하와이 호놀룰루에 의사부(議事部)가 설치되었다. 이때 의사부 위원으로 선임되어 임시정부 후원을 위한 사업과 외교, 선전 활동을 주도적으로 추진하였다. 1943년 9월 이승만 계열의 동지회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탈퇴하고, 1944년 6월 독자적으로 외교위원부를 설치하였다. 이에 재미한족연합위원회도 별도의 외교사무소(外交事務所)를 개설하고 외교 사무를 처리하였다. 이러한 일로 분쟁이 생기자 임시정부에서는 11월 주미외교위원부(駐美外交委員部) 위원을 새롭게 선임하였다. 이때 위원부의 외교위원으로 선임되어 분쟁을 해소하기 위해 힘썼다. 그 후 1945년과 1946년 연속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에 당선되어 더욱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최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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