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인명사전 -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1861. 9. 26 ~ 1921. 5. 2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독립협회
- · 조선광문회
- · 동아일보
포상 정보
- · 독립장(1962)
관련 사건
- · 만민공동회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2) 1861년 9월 26일 경기도 양지군(陽智郡) 주서면(朱西面, 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의 일부)에서 아버지 유최근(柳最根)과 경주(慶州) 김씨인 어머니 김정희(金貞姬) 사이에서 두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字)는 경집(敬集), 호는 석농(石儂)이며 이명으로 유은식(柳殷植)이 있다. 전주 유씨 족보에 의하면 부친 유최근은 능참봉(陵參奉)을 지낸 것으로 확인된다. 27세까지 고향에서 한학을 공부하여 학문과 문장에 능했다고 한다. 일찍부터 서양의 지식을 번역한 중국의 한역 서적을 접한 탓에 개신 유학자로 나아갈 수 있었다. 따라서 전통적인 유학에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서양의 의학이나 천문지리학에도 조예가 있었다. 34세인 1894년에 서울로 올라왔으며, 1895년 4월에 탁지부(度支部) 주사에 임명되었다. 당시 어윤중(魚允中)을 통해 임명되었는데,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친러정권이 장악하면서 1896년 3월에 사임하였다. 관직 활동 이후 서울에서 활동하며 다양한 인사들과 교유관계를 가졌다. 이런 정황은 문집인 『석농유고(石儂遺稿)』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석농유고』는 지인들과의 연회 자리에서 시회(詩會)를 벌이면서 인생과 자연을 노래한 다수의 시문들을 편집한 한시집(漢詩集)이다. 『석농유고』 외에 『석농 유근선생시집(石儂 柳瑾先生詩集)』을 통해서도 교유관계를 알 수 있다. 이 시집을 통해 서울에 온 이후 민영환(閔泳煥)을 비롯한 당대 고관들과 경국사(慶國寺)·연화사(蓮花寺) 등에서 모임을 가졌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문집에는 대한제국에 올린 두 편의 상소문도 확인된다. 상소문의 주제는 정부를 혁신하는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아관파천 이후 재야 인사가 되어 1897년부터 독립협회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독립협회에서의 활동으로 장지연(張志淵)·박은식(朴殷植)과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장지연과는 장지연의 삼남 장재륜(張在輪)과 장녀 숙희(淑熙)가 혼인을 하면서 사돈지간을 맺을 정도로 친밀하였다. 독립협회가 해산될 즈음에 남궁억(南宮檍)·장지연과 함께 『황성신문(皇城新聞)』 창간에 참여하였다. 초기부터 황성신문의 주필과 논설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장지연과 장문의 논설을 경무청의 검열을 받지 않고 인쇄소로 넘겨 「시일야방성대곡(是日夜放聲大哭)」이 세상에 발표되도록 하였다. 11월 20일 장지연을 비롯한 사원 10여 명이 구속되었고 황성신문은 무기한 발행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때를 기점으로 교육계몽운동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발행정지 처분이 해제된 이후 1907년부터 황성신문사 사장을 맡았다. 조선광문회(朝鮮廣文會) 활동을 통하여 민족계몽운동을 펼쳤다. 조선광문회는 역사 연구와 국학 부흥을 목적으로 조직되었으며, 1910년대에 최남선(崔南善)을 중심으로 20여 권의 고전을 발간하고, 국어사전을 한국 최초로 편찬하는 등의 이력을 지닌 대표적인 민족계몽 단체였다. 핵심 인사로는 주시경(周時經)·김두봉(金枓奉)이 있다. 국어학과 국문학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한글운동을 펼친 것으로 알려졌다. 광문회에서 고전 간행과 사전 편찬에 직접 참여하여 상근 고문을 맡았다. 한학 실력이 뛰어났기에, 최남선은 한문대자전의 편찬 책임을 부탁하였다. 아울러 우리말에 대한 연구와 보급에도 주력하였다. 1911년부터 주시경이 건립한 조선어강습원의 원장을 담당하였다. 이 시기에 교육계에서도 활동하였다. 45세인 1905년에 휘문의숙(徽文義塾)과 계산학교(啓山學校) 등에서 한문교사로 활동하였고 교장과 숙감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15년에는 최남선의 지원 하에 중앙학교(中央學校)에서 2년간 교장직을 맡았으며, 1915년 3월 경성보통학교 부설 교원양성소 학생들이 조직한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獎勵稧)에도 관여했다. 아울러 한국 역사 교과서 편찬에도 적극적이었다. 1906년에 『신정동국역사(新訂東國歷史)』, 1908년에 『초등본국역사(初等本國歷史)』, 1910년에 『신찬초등역사(新撰初等歷史)』 등의 초등 및 중등용 교과서를 집필하였다. 『신정동국역사』는 국한문으로, 단군조선부터 고려까지를 편년체로 서술한 휘문의숙에서의 중등용 교과서였다. 『초등본국역사』는 국한문이었고, 단군조선부터 대한제국 순종 대까지를 간략히 다루고 있는 통사 구조의 교과서이다. 삼한(三韓)을 봉건시대로 상정하고, 후삼국(後三國)과 발해(渤海)를 이전 시기인 삼국시대와 동격으로 보는 역사관을 지니고 있었던 점이 특징이다. 『신찬초등역사』는 소학교 교과서로 제작되었는데, ‘단군조선기, 기자조선기, 삼한기, 삼국기, 신라기, 고려기, 본조기’로 시대를 구분하고 있다. 본조기는 ‘고려말-구한말’까지 해당한다. 다만 1910년에 제작된 『신찬초등역사』는 이전의 교과서 2권과는 달리 다소 일제와 타협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일제의 엄격한 교과서 검정과정을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추정된다. 대종교(大倧敎)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1909년 나철(羅喆)·오기호(吳基鎬) 등이 창립한 대종교에 가입하여 대종교의 의식과 교리 연구의 책임을 맡았다. 대종교에 입교한 이후 규제기초위원과 단조사고(檀祖事攷) 편찬위원, 참교(參敎), 지교(知敎), 상교(尙敎) 등을 역임하였다. 이를 통해 조선 고래(古來) 종교를 조사·연구하게 되면서 언어 습속과 문헌 등을 탐구한 것으로 알려진다. 1919년 만세운동 이후, 일제가 한국인의 언론 자유를 일부 허용하자 다시금 신문사업에 참여하면서 동아일보 창간에 일조하였다. 1920년 4월 양기탁(梁起鐸)과 함께 동아일보사의 초대 편집감독으로 추대되었다. 편집감독 일을 하던 중 1921년 5월 20일에 6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동아일보는 5월 22일자 신문에 ‘언론계의 원로, 교육의 공로자’라는 표제로 사망 소식을 알렸다. 장례식은 7일장으로 결정되어 25일 동아일보사 앞뜰에서 거행되었다. 이 자리에는 동아일보사 임직원과 대종교 대표들, 지방유지, 고등보통학교와 중앙학교, 휘문의숙 등 학교 학생들이 참석하였다. 6월 29일의 추도식에도 학생 1천여 명이 참석하였고, 일본 도쿄(東京)에서도 추도식이 거행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왕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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