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계홍
龍桂洪1856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2)
관련 사건
- · 수안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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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2) 황해도 수안군(遂安郡) 대천면(大千面) 상대리(上垈里) 출신이다. 1920년 판결문에 따르면 당시 나이가 64세로 1856년생으로 추정된다. 자료의 한계로 정확한 사망연월일과 성장 과정 등은 확인할 수 없다. 1919년 당시 천도교인으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그 해 3월 수안군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을 비롯해서 평양·안주·의주·선천·원산·진남포에서 일제히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황해도 곡산군(谷山郡) 곡산면(谷山面) 남천리(南川里)에 거주하는 이경섭(李景燮)은 천도교 중앙총부의 월보과장(月報課長) 이종일(李鍾一)로부터 만세운동 소식과 더불어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았다. 아울러 황해도 일대에서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지시받았다. 3월 1일 저녁 이경섭은 수안군 수안면(遂安面) 석교리(石橋里)의 수안 천도교구에서 교구장 안봉하(安鳳河)를 비롯한 천도교 인사를 만났다. 그들에게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는 한편 독립선언서 70장을 주면서 수안군 일대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제안하였다. 3월 2일 수안 천도교구실에서는 안봉하를 비롯해서 독립을 염원하였던 천도교인들이 모였다. 그 자리에 참석한 인사는 김영만(金永滿)·나찬홍(羅燦洪)·최용식(崔鎔植)·이영철(李永喆)·홍석정(洪錫楨)·한청일(韓淸一)·김형선(金炯宣)·이달하(李達河)·나용일(羅容日)·장성도(張聖道)·홍두옥(洪斗玉)·안창식(安昌湜)·홍길재(洪吉載)·이윤식(李潤植)·홍두익(洪斗益)·이응호(李應浩) 등이었다. 그들은 3월 3일 수안읍 일대에서 천도교인들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하지만 황해도 경부부장의 전보를 받은 수안헌병분대가 수안 천도교구실을 급습해서, 독립선언서를 압수하고 모임에 참여한 인사를 연행하였다. 헌병대의 체포를 피한 이영철·홍석정·한청일은 수안군 내 천도교인들을 독려해서 3월 3일에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재차 결의하였다. 3월 2일 대천면(大千面) 시리원리(柴里院里)에 거주하였던 오관옥(吳觀玉)으로부터 만세시위 참여를 권유받았다. 평소 독립을 열망하였던 바, 오관옥의 권유에 찬성하고 3월 3일 수안군 만세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3일 오전에 시리원리 사람들과 함께 수안군에 도착하였다. 오후 12시에 수안헌병분대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는 사실로 보건데, 오전 11시에 이동욱과 오관옥이 이끄는 시위대에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이동욱과 오관옥이 주도한 시위대는 독립을 주장하면서 헌병분대의 퇴거를 요구하였다. 시위대가 수안헌병분대의 진입을 시도하자, 일제 헌병은 시위대를 향해서 발포하였다. 발포 소식이 전해지자, 오후 1시에 홍석정·한청일·오관옥은 재차 150여 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헌병분대로 갔다. 그 곳에서 헌병분대 퇴거를 요구하였다. 시위대가 정문을 돌파하고 경내에 진입하자, 일제 헌병은 재차 시위대를 향해서 사격을 가하였다. 이로 인해 시위대의 선두에 있었던 홍석정과 한청일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총상을 입은 오관옥 역시 후에 사망하였다. 수안군에 소대 및 중대 병력을 증파한 일제는 시위에 참여한 인사를 색출하고 붙잡았다. 그 과정에서 일제에 의해 연행되었으며, 수안군 만세시위에 참여한 인사들과 함께 내란죄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이 이른바 내란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리자, 1920년 8월 7일 경성지방법원은 이른바 보안법 위반·소요죄·저택침입죄를 적용하였다. 같은 해 1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로 1년 3월(미결구류일수 중 450일 본형 산입)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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