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용호
安容鎬1884. 12. 17 ~ 1942. 12. 6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영주군 풍기장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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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4년 12월 17일 경상북도 영주군(榮州郡) 봉현면(鳳峴面) 대촌동(大村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9일 영주군 풍기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주도하였다가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이 전국의 도시와 지방 곳곳으로 확산되었다. 1919년 3월 21일 봉화군 상운면(祥雲面)의 박인서(朴仁緖)가 주도한 영주면에서 처음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어서 하리면(下里面)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으며, 풍기면(豊基面)의 만세운동은 영주군에서는 세 번째이다.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인근 지역에서 연이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만세운동을 계획하게 되었다. 1919년 4월 3일 뜻을 같이할 사람들을 모으기 위하여 같은 마을에 사는 최성원(崔盛源)의 집에 찾아가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만세운동을 일으키자고 권유하였다. 이에 최성원과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남영진(南永鎭)도 찬성하며 구체적으로 만세운동을 준비하게 되었다. 세 사람은 4월 9일 풍기면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이때 살고 있는 마을이 아닌 풍기면 장날을 택한 것은 풍기면 장날에는 봉현면을 비롯하여 상리면(上里面)·순흥면(順興面)·안정면(安定面) 등 수 천 명의 장꾼과 주민들이 모여 들어 인근에서는 가장 큰 장이 형성되었기 때문이었다.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먼저 종이로 태극기를 만들자 동지 최성원과 남영진도 이를 본떠서 만세운동에 쓸 태극기를 제작하며 구체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1919년 4월 9일 거사 당일, 풍기면 장날에는 6,000~7,000명의 사람들이 운집하였고, 주도자 세 사람은 아침부터 태극기를 몰래 숨기고 풍기 시장에 모였다. 시장이 서는 장소 중에서도 풍기헌병주재소 동쪽 공터의 쌀 시장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 세 사람은 이곳에서 만세운동을 펼치기로 정하였다. 오후 3시 경 주도자들은 손으로 그려 만든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불렀고, 이에 100여 명의 군중들이 몰려들어 만세시위에 호응하였다. 만세시위 소식을 접한 헌병들은 즉시 출동하여 세 사람을 붙잡아 풍기헌병주재소로 끌고갔으며, 모여 있던 군중들도 해산시켰다. 이들이 붙잡히면서 풍기면 장날의 만세시위가 중단되는 듯 하였지만, 시장에서 세 사람의 만세시위를 보고 호응하였던 황정흠(黃鼎欽)·김용준(金容俊)·남상필(南相弼)·황정흠(黃政欽)·이화백(李和伯) 등 5명에 의해서 만세시위가 이어졌다. 이들은 시장의 다른 쪽에서 약 50명의 군중과 함께 장터를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들 5명 또한 출동한 헌병들에 의해 모두 붙잡혔으며 시위대도 흩어졌다. 1919년 4월 19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풍기 장터 만세운동 주도자 3명 중 가장 높은 형량이었다. 옥고를 겪던 중 이듬해인 1920년 4월 한국 왕세자 결혼을 기하여 내려진 은사령(칙령 제120호)에 따라 4월 28일 형량이 징역 1년 5일로 경감되면서 총 약 1년 1개월간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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