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중
安時中1890. 12. 20 ~ 1974. 11. 3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함안군 함안 읍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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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0년 12월 20일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함안면(咸安面) 강명리(康命里)에서 태어났다. 한학을 수학하였고, 1919년 3월 19일 함안군 함안 읍내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1919년 3월 19일 일어난 함안 읍내 만세운동은 고종의 국상에 참여했던 지역 인사들이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면서 계획되었다. 이들과 지역의 인사들이 태극기와 독립선언 전단을 제작하고 각 마을별로 연락책을 조직하여 군중을 동원하는 준비 작업에 함께 나섰다. 3월 19일 거사 당일 비봉산(飛鳳山)에서 고천제(告天祭)를 지내고, 읍내 봉성동(鳳城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것으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선두에서 적극적으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고, 함안 경찰관 주재소, 함안 군청으로 시위대를 지휘하여 나아갔다. 최초 수백 명으로 시작한 만세시위는 장날 모인 군중이 합세하면서 3천 명까지 불어났다. 일제 경찰의 폭압적 진압이 시작되자 시위대의 자세도 적극적으로 변화하였다. 주재소, 군청, 등기소, 법원출장소, 우체국 등 식민 지배 말단 기관들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파손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 기물과 서류를 파손하고 관계자들을 응징하는 데 앞장섰다. 일제는 시위대의 규모가 커지고 시위 방법도 적극적으로 변하자, 경찰만으로 진압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마산의 일본군 중포병대대의 출동을 요청하였다. 총검으로 무장한 일본군이 시위진압에 직접 나서게 되자 시위대는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시위 주도자 색출을 위한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불었고, 수많은 사람들과 같이 붙잡혀 가혹한 고문을 동반한 조사를 받고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5월 2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이른바 소요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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