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元佑
元佑1902. 3. 13 ~ 1938. 2. 24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신간회 동경지회
- · 협동조합운동사
- · 학우회
- · 조선인단체협의회
- · 함창협동조합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902년 3월 13일 경상북도 상주군(尙州郡) 낙동면(洛東面) 상촌리(上村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풍산(豐山)이며, 부친은 당시 상주 지역의 유력자였던 유관식(柳寬植)이다. 고향에서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경성에 올라가 상급학교 진학을 준비하였다. 이후 대구제일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으나,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일본인 교사의 부당한 처우에 대항해 동맹휴학을 주동한 일로 퇴학 처분을 받았다. 1920년대 중반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稲田大學) 정경학부(政經學部)에 입학하였다. 1927년 5월 민족협동전선 수립을 목적으로 결성된 신간회(新幹會) 도쿄지회 초대 간사로 선출되었다. 또한 같은 시기 식민지 조선의 경제 문제를 타개할 목적으로 유학생들이 결성한 협동조합운동사(協同組合運動社)의 재무부 임원으로 부임하였다. 이러한 활동에는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재학 중이던 고향 선배 전진한(錢鎭漢)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여겨진다. 전진한은 신간회 도쿄지회 서무부 부원이자, 협동조합운동사 재무부원으로, 사실상 두 단체를 창설하고 이끈 사람이었다. 이후 전진한과 함께 1927년 7월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국내 순회 강연에 나섰다. 각 농촌을 돌며 ‘협동조합운동과 세계적 대세’, ‘협동조합의 이론과 실제’ 등을 강연하여 열악한 농촌 현실을 비판하는 한편, 농민들의 각성과 단결을 촉구했다. 한편으로 신간회 상주지회 발회식 때 축사를 하는 등 고향의 청년운동 발전에도 일익을 담당하였다. 1927년 12월 18일 신간회 도쿄지회 제2회 대회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조직을 장악하였을 때에는 이를 규탄하면서도 신간회 활동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신간회 기관지 『신간신문(新幹新聞)』 발행을 시도하고, 1929년 2월 개최된 제3회 대회를 주도하여 원산총파업 응원, 반동단체 박멸운동 전개 결의 등을 이끌어내는 등, 민족협동전선을 지켜내기 위해 노력하였다. 1928년 서무부 담당으로서 도쿄지회 제2회 대회 준비에 진력하였다. 도쿄의 한인 단체가 합동하여 조선총독부폭압정치반대동맹(朝鮮總督府暴壓政治反對同盟)을 결성하자 정치문화부 간사로 활동하며 만주 지역 한인 노동자 축출사건 등 여러 민족문제에 깊숙이 개입하였다. 1929년 5월 당시 최대의 유학생 연합단체였던 재일본조선인유학생 학우회(學友會) 회장에 선출되어 일제의 탄압으로 침체된 조직의 복구와 기관지인 『학지광(學之光)』의 재발행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다음 달에 개최된 조선인단체협의회(朝鮮人團體協議會) 대회에서 일본의 유학생들이 “조선운동을 위해 전초적 투쟁”을 해야 함을 역설하는 등 한인 유학생의 리더로 활약하였다. 독립운동의 방식에서 폭력 등의 수단으로 일제에 직접 대항할 것을 주장한 일부 급진파와는 다른 면이 있었다. 1929년 6월 이를 오해한 일부 아나키스트들로부터 습격을 받기도 하였다. 이 일로 병원 신세를 졌으며, 학우회 회장직도 내려놓았다. 그러나 일각의 비판과 공격에 굴하지 않고 퇴원 후 곧바로 유학생들을 모아 국내의 사정을 통계적으로 조사하여 정확한 현실 파악을 기한다는 취지로 조선학회(朝鮮學會)를 결성하여 운동을 지속하였다. 1931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곧바로 고향인 상주로 돌아왔다. 지역 청년 운동가 김한익(金漢翊)과 상주군 함창면(咸昌面) 소재 생산 협동체인 함창산업조합(咸昌産業組合)에서 활동하였다. 이 조합에서는 당초 일본인 이사가 활동했는데 자격 부족과 임금문제로 불신임된 뒤, 1932년경 김한우가 부임하였다. 그 뒤 농촌개발과 산업 선전이 “민중의 이익”이라는 기치 아래 여러 사업을 펼쳐 전국에 이름을 떨쳤다. 이 조합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여 1936년 10월 이사로 임명되었다. 이 밖에 상주교육협회 이사를 맡아 유치원 설립에 나서는 등 지역 발전을 위해서도 헌신하였다. 1938년 2월 안동농민회(安東農民會) 초청으로 농민계몽을 위한 강연을 하던 중 뇌출혈로 쓰러져 같은 달 24일 사망하였다. 장례는 군민장(郡民葬)으로 거행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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