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룡
安京龍1896 ~ 1930. 7. 24
포상 정보
- · 애족장(2002)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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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2) 자료에 따르면 1930년 당시 35세로, 1896년생으로 추정된다. 전해진 자료의 한계로 출신지역과 성장과정은 확인할 수 없으나 활동 당시 함경남도 단천군(端川郡)(현 단천시) 하다면(何多面) 송파리(松坡里)에 거주하였다. 단천군 하다면 면민으로 1930년 7월 18일부터 7월 20일까지 전개된 단천군 삼림조합반대 및 처우개선 투쟁에 동참하였다가, 7월 20일 격화된 시위를 유혈 진압한 일제 경찰의 총을 맞고 7월 24일에 사망하였다. 일제강점기의 삼림조합은 산림자원보호를 목적으로 조직한 정책적인 관제단체로 조선임야조사사업을 완료한 후 각 군에서 산림보호와 개발이란 명목 하에 모든 민유림소유자를 조합원으로 하여 결성케 한 것이다. 삼림조합은 강력한 임산물채취금지 규정을 제정하여 산림자원을 이용한 숯과 땔감 판매로 생계를 유지하던 해당 군의 산간 주민의 생계 수단을 박탈하였다. 단천군민들은 1929년 3월부터 추진된 단천군 삼림조합결성에 결사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하였지만 군 당국은 1930년 5월에 조합 결성을 강행하였다. 삼림조합 설립 후 조합 간수들이 삼림보호란 명목으로 단천군민들에 대한 각종 행패를 자행하자 조합에 대한 군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갔다. 1930년 7월 단천군 하다면 삼림조합 간수가 산림단속 중 연대리(蓮坮里) 주민 허달규를 도벌(盜伐) 혐의로 조사하려다 대신 임산부인 허달규의 부인을 심문하던 중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분개한 주민들의 산림 간수에 대한 집단적 항의가 단천군 농민운동 지도세력들의 도움으로 삼림조합반대운동으로 진전되었다. 1930년 7월 18일 함남 단천군 하다면민 약 200여 명이 삼림조합의 부당함을 해결하고자 면사무소와 단천군청을 향하여 몰려가자, 일제 경찰이 조속한 처리를 약속하면서 해산을 종용하였고 이를 믿고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하지만 그 날 밤에 일경이 시위주도자로 50여 명을 검거하자 7월 19일에 하다면 면민 400여 명이 다시 집합하여 단천군청으로 몰려가서 연좌시위를 전개한 후 경찰서와 군청에 집결해 삼림조합반대를 외치며 군수면담을 요청하였다. 일제 당국의 면담 요청 수용으로 해산하면서 군민들은 단천군 내 8개 면의 군민대회를 계획하였다. 7월 20일에 단천군 하다면, 파도면(波道面), 복귀면(福貴面) 지역을 중심으로 약 2,000명의 군민들이 단천군민대회에 가담하였다. 군민대회의 대표자는 단천군수 임창재(任昶宰)에게 군민들의 이익을 위해 관제 삼림조합해산과 피검자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군수가 응하지 않자 시위 군민들이 격분하여 군청 안으로 돌격해 유리창을 깨뜨리며 군수와의 면담을 요구하였다. 다시 시위대는 경찰서로 이동하여 붙잡힌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자 경찰과 정면충돌하였다. 일본경찰 30여 명이 시위대를 강제로 해산시키려고 공포탄과 실탄 수십 발을 발포하면서 무력으로 탄압하였다. 당시 시위 현장에서 일제 경찰의 발포로 총에 맞아 7월 24일에 사망하였다. 이때 최두필(崔斗弼)·장종형(張宗亨)·김계환(金啓煥) 외 1인이 발포현장에서 함께 사망하였고, 이원호(李元鎬)·김을룡(金乙龍)·김득수(金得洙)·최종협(崔鐘協)·유경을(劉京乙)·이선식(李善植)·안길현(安吉炫)··김창언(金昌彦)·김응철(金應喆)·허병률(許丙律)·안병환(安丙煥)등도 총상을 입고 사망하였다. 또한 원용섭(元容燮) 등 십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강영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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