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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호

辛正浩

1928. 3. 3 ~ 1989.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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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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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천(永川)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영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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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순국당

포상 정보

  • · 건국포장(1993)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1993) 1928년 3월 3일 경상북도 영천군(榮川郡) 신녕면(新寧面)에서 신치봉과 공송죽의 4남 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이필전과 결혼하여 1남(신기용) 3녀를 두었다. 유년기에 일가가 부산 동구로 이주하였고, 1943년 초량상업학교에 입학하였다. 1944년 비밀결사 순국당(殉國黨)을 조직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43년 봄 친구인 차병곤(車炳坤)·박정오(朴楨五)와 윤독회(輪讀會)를 결성한 것을 계기로 학생 항일조직이 태동되었다. 차병곤은 조선청년독립당 첩보수집 담당이자 사촌형인 이관수(李觀洙)로부터 항일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또래의 청년 학생들을 규합하여 초량상업학교 2학년 재학 중인 1944년 5월 1일, 자신의 집(현 범일동 부산진 남문시장 입구 오른편 세 번째 집)에서 순국당을 결성하였고, 조직책을 맡았다. 당시 참석자는 13인이었다. 순국당의 행동 강령은 “민족 독립과 주권 회복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며, 행동 목표는 “첫째, 고이소(小磯) 총독 암살, 둘째 일본군 시설 파괴, 셋째, 일본인 집단 거주지 방화, 넷째, 은행 습격, 다섯째, 공습 시 산불 놓기” 등이었다. 이 행동 목표를 종이에 적은 뒤 “대한 독립 만세”라고 쓰고 당원들이 혈서로 연서한 다음, 박정오의 집에 보관해 두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자인」 멜로디에 당수 차병곤과 문화책 배광진이 작사한 가사를 “「1절」 동월 동일 동시에 이 내 몸 죽자고, 용감한 이팔 소년 맹세를 하고, 「2절」 자유에 구속받은 우리의 민족, 아름다운 강산에 꽃이 피도록. 「후렴」 우리들은 순국당 단결하면서, 끝까지 싸우리라. 조국을 위하여”라고 붙여 순국당 당가로 불렀다. 1차 계획으로 차병곤과 박정오가 5월 8일 영도다리 우측 첫 난간에 “대한 독립 만세”라고 쓴 벽보를 붙이는 데 성공하였다. 2차 계획에 나서서 진해 근교 일본군 군용철교를 파괴하고자 했으나 폭약 구입 담당인 차병곤과 연락에 차질이 생겨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귀가하였다. 총독 암살 등의 계획 실현이 어려워지자, 7월 상순 자택에서 임시총회를 열고 중국 동북지역으로 가서 항일 독립군에 들어갈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차병곤과 윤창석(尹昌錫)이 선발대로 먼저 함북 길주(吉州)에 도착했고, 2차로 박태권(朴泰權)과 김수성(金守性)이 합류하였다. 그러나 북부산경찰서 고등계 형사 김종관에게 정보가 알려져 7월 25일 박정오가 붙잡히는 것을 시작으로, 7월 28일 앞서 길주로 간 4인도 검거되고 순국당의 존재가 드러나, 8월 1일까지 부산에서 망명 준비를 하던 나머지 당원들과 함께 붙잡히고 말았다. 이후 1년간 검찰에 계류된 채 부산형무소 구치감 독방에서 미결수(수인번호 425)로 구류되었고, 가족 면회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구류 기간이 만기된 1945년 8월 1일 차병곤·박정오와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된 채로 광복을 맞이하였다. 같은 해 8월 18일 공소기각으로 석방되기까지 1년여 간 옥고를 겪었다. 광복 후 고문 후유증을 겪으면서도 동아대학교(東亞大學校) 경제과를 졸업한 뒤 김해여자중학교와 경남중학교 등지에서 교사를 지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조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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