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문
安秉文1897. 10. 23 ~ 1922. 6. 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영동군 매곡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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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7년 10월 23일 충청북도 영동군(永同郡) 매곡면(梅谷面) 옥전리(玉田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2일에서 6일까지 전개된 매곡면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가 고초를 겪었다. 매곡면의 만세운동은 안광득(安光得)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서울에서 만세시위를 목격하고 참여한 후 자신의 고장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킬 생각으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였다. 안광득의 연락을 받고 안준(安準)·김용선(金容善)·신상희(申相熙) 등과 함께 안녕(安寧) 마을의 비밀회합에 참여하였다. 안광득으로부터 서울의 독립운동 상황을 듣고,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의 내용을 읽어본 후 만세시위 준비를 결의하였다. 이후 구체적인 만세 시위 준비 과정에서 장복철(張復哲)·임봉춘(林奉春)·남도학(南道學) 등이 동지로 결합하였다. 이들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문종이에 필사하고 태극기 400여 매를 제작하였다. 비밀모임에서 첫 거사일을 밤나무 묘목장의 주민동원 작업이 예정된 1919년 4월 2일로 결정하고, 각자의 역할을 분담하여 주민들의 참여 독려를 담당하였다. 4월 2일 오전 밤나무 묘목장에 모인 100여 명의 주민들 앞에서 안광득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주민들이 호응하자, 안준의 만세 선창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이후 안광득·안준과 함께 시위대를 지휘하여 노천리(老川里)의 면사무소 앞에서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이 자리에서 “대한(大韓)의 민족이라면 한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독립투쟁의 선상에 참여해야 할 것”이라고 연설하여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받았다. 이후 면장과 면직원들까지 ‘독립만세’를 선창케 하여 만세시위에 참여시키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오후 5시 경 이웃한 황간(黃澗)읍의 장터로 행진하였다. 이날이 황간의 장날이었기 때문에 장터에 모인 주민들에게 시위 참여를 호소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황간장은 만세시위를 예상한 일제 경찰에 의해 이미 철시되었기에, 더 이상 만세시위를 진행하지 못하고 해산하였다. 하지만 이날의 만세운동 소식은 매곡면 전체로 알려져 4월 3일에는 옥전리·노천리를 비롯한 매곡면의 여러 마을에서 주민들이 참여하여 곳곳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연창하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4월 4일에는 오전 11시 경부터 면사무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날 시위에는 지난 밤 만세시위의 영향으로 800여 명의 주민이 면사무소 앞에 집결하였고, 면장 이하 면사무소의 직원들과 거주 일본인까지 만세시위에 참여시켰다. 이와 같은 대규모 만세시위가 발생하자, 일제는 추풍령(秋風嶺)의 헌병분견대원과 수비대를 매곡면으로 급파하여 만세시위를 탄압하였다. 이때 일제 헌병대로부터 안광득·임진규(林珍圭)·남도학이 체포되어 추풍령 헌병분견소로 압송되었다. 이에 안준·장복철·김용선·신상희 등과 남아있는 시위대 150여 명을 지휘하여 추풍령의 헌병분견소로 쫓아가 체포된 동지들을 구출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헌병분견소의 창고에 불을 질러 전소시킨 뒤 4월 5일 새벽 5시 경 해산하였다. 다음날인 4월 6일에도 안준·신상희·김용선·장복철 등과 체포된 동지들의 구출을 위해 지역 주민들을 설득하여 30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독립기’를 앞세우고 오전 11시 경 추풍령 헌병분견소로 가서 체포된 안광득·임진규·남도학의 석방을 요구하는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일제 헌병들은 시위대의 요구를 묵살하고 발포로 응대함에 시위대는 해산되었고, 안준·신상희·장복철·김용선 등과 함께 붙잡혔다. 일제 헌병의 조사과정에서 매곡면의 만세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23일 공주지방법원 대전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3월을 받고 항소하였다. 같은 해 5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도 징역 1년 3월을 받았다. 이에 다시 불복하여 상고하였으나, 그 해 7월 5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뒤 고문과 옥고의 후유증으로 얼마 지나지 않은 1922년 6월 5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도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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