劉光屹
光屹미상 ~ 1936. 1. 26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통의부
포상 정보
- · 독립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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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95) 전라북도 고창군(高敞郡) 출신이다. 자료의 한계로 출생시기는 알 수 없다. 이명으로 한자를 달리 한 유광흘(柳光屹)을 사용하였다.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대한통의부는 의군부(義軍府)·광복단(光復團)·광한단(光韓團)·흥업단(興業團) 등이 통합하여 조직한 단체로, 1922년 8월 대한통의부에 참가하여 의용군 제3중대에서 활동하였다. 통의부에는 조직 당시부터 공화주의 계열과 복벽주의 계열 사이의 문제가 내재되어 있었다. 여기에 군사력을 지휘하는 문제까지 더해져 갈등은 점차 높아졌다. 결국 1923년 2월 복벽주의 계열이 통의부에서 이탈해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를 조직하였다. 이 무렵 항일 무장투쟁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1924년 4월 1일 통의부 의용군 1·2·3중대, 유격대, 독립소대 대표 78명이 모여 육군군사회의를 개최하였다. 최지풍(崔志豊)·박응백(朴應伯)·김상옥(金尙沃)·김용택(金龍澤)·김득성(金得成)·맹성록(孟性祿)·심용준(沈鏞俊) 등 20명과 함께 제3중대 대표로 참가하여 「남만 군민에게 경고함(南滿軍民ニ警告ス)」이라는 격문과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격문에서는 통의부 내부에 “왜(倭)를 물리치려는 마음은 꿈속에서도 갖지 않고 (중략-필자) 언제나 타인에게서 빼앗아 자기의 이익으로 삼고 권력을 탐하며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일삼”는 세력이 있음을 비판하였다. 선언문에서는 독립을 위해서는 단결해야 하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직할’로 활동할 것을 천명하였다. 이들은 통의부를 이탈하여 임시정부의 직속 부대임을 표명한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를 조직하였다. 참의부에 참가하여 소대장, 제2중대 부관으로 활동하였다. 임시정부를 비롯한 각지의 독립운동가들은 새로운 차원의 독립운동방략을 모색하기 위하여 1923년 1월 상하이(上海)에서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였다. 국민대표회의에서 개조파와 창조파 사이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회의는 결렬되었다. 이후 육군군사회의에 참석했던 대표들과 함께 1924년 5월 ‘민족 독립’을 위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치’ 아래 단결해야 한다는 내용의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만주에서 전 민족의 힘을 하나로 모아서 보다 강력한 독립단체를 만들어 항일전선을 형성하자는 분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1928년 9월 민족유일당조직동맹(民族唯一黨組織同盟)이 결성되었다. 1929년 3월 지린(吉林)에서 참의부 대표 임병무(林炳武)·심용준, 정의부 대표 이동림(李東林)·현익철(玄益哲)·고이허(高而虛)·고활신(高轄信)·최동욱(崔東旭)·이탁(李鐸), 신민부 대표 이교원(李敎元) 등과 함께 민족유일당조직동맹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를 거쳐 3부가 통합하여 4월 1일 국민부(國民府)가 조직되었다. 1929년 8월 국민부의 무장 대오인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에 참가하여 제3대장에 선임되어 집동지방(輯東地方)과 집서지방(輯西地方)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1월 4일 조선혁명군 제4대 지휘부 부관으로서 안홍(安鴻)·임병무(林秉武)와 함께 논의하여 한교동향회(韓僑同鄕會) 환런지부(桓仁支部) 변창죽(邊昌竹) 부자(父子)를 회유하기 위해 밀사를 파견하였다. 1933년 1월 26일 조선혁명군 제6중대장에 선임되어 대원 약 20명과 함께 환런현(桓仁縣) 남북전자(南北甸子)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36년 1월 26일 조선혁명군 제6중대장으로 반만항일투쟁을 전개하던 중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최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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