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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형

安國亨

1909. 1. 8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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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안국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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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구성(龜城)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북도 구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대한통의부
  • · 정의부
  • · 조선혁명군

포상 정보

  • · 독립장(1995)

관련 사건

  • · 일제 밀정 처단
  • · 군자금 모금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95) 1909년 1월 8일 평안북도 구성군(龜城郡) 서산면(西山面) 신덕동(新德洞)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안명보(安明保)·전학송(全學松)·김자송(金字松) 등을 사용하였다. 17살이던 1923년 만주로 건너가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에 가입하였다. 대한통의부는 1920년 10월부터 이듬해 4~5월까지 일제가 서북간도의 이주한인과 독립군들을 대상으로 자행한 간도참변(間島慘變) 후 남만주의 독립군 세력을 복원하기 위해 결성된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확대 발전시켜 탄생한 통합 독립군단이었다. 1922년 8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대한광복군총영(大韓光復軍總營) 등 남만주의 독립운동 단체 대표들이 환런현(桓仁縣) 마권자(馬圈子)에서 통합회의를 열고 발족시켰다. 총장은 김동삼(金東三)이었고, 재무부장 법무부장 현정경(玄正卿), 교통부장 오동진(吳東振), 군사부장 양규열(梁奎烈), 사령관 김창환(金昌煥) 등이었다. 주근거지는 콴뎬(寬甸)·환런·지안현(輯安縣) 등 압록강변의 남만주 일대였다. 통합군단인 통의부가 1922년 말부터 이념적인 문제로 내부 분란이 일어나 1923년 초 복벽주의계 인사들이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를 성립시켜 분립해 나갔다. 1924년 초에는 채찬(蔡燦)·박응백(朴應伯) 등 무장활동파 인사들이 참의부(參議部)를 성립해 이탈하였다. 이에 통의부의 나머지 인사들은 1924년 중반부터 또 다시 독립운동세력의 통합에 노력해 그 해 11월 24일 정의부(正義府)를 성립시켰다. 이 정의부에 가담한 단체는 통의부를 비롯해 광정단(光正團)·의성단(義成團)·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 등 8개 단체였다. 정의부는 하얼빈 이남의 광할한 남만주를 관할지역으로 해 이 곳에 거주하는 이주 한인들을 위한 자치활동을 펼치는 한편, 의용군을 편성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이때 정의부 의용군에 편입되어 제2중대원이 되었다. 이곳에서 항일무장 투쟁력이 탁월한 행동대장 이진무(李振武)와 홍학순(洪學淳)을 만났다. 수많은 국내진입전을 전개해 일제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힌 이들이 조직한 정의부 별동대에 가담해 활동하게 된 것이었다. 정의부 별동대원으로 1928년 9월 1일 홍학순의 지휘를 받으며 동료대원 이원(李園)과 함께 랴오닝성(遼寧省) 토성자(土城子)로 출동하였다. 그곳에서 독립군단의 기밀을 빼내 일제 경찰대에 팔아먹는 밀정 최상진(崔相振)을 처단하였다. 이어 얼마 후에는 동료 황찬규(黃贊奎) 등 5명의 대원과 함께 밀정 이모(李某) 등 2명을 처단하였다. 1920년대 중후반 만주지역의 독립운동계에 민족유일당운동이 일어났다. 전만주의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로 통일하자는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완전한 성공은 거두지 못했지만, 남만주는 1929년 이후 국민부(國民府)와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및 조선혁명군을, 북만주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과 한국독립군을 성립시키며 양분화 된 통합을 이루었다. 이때 행동대장 이진무를 따라 조선혁명군의 독립군이 되었다. 1930년 6월경 국민부 간부들 중 일부가 어렵게 모아진 군자금을 낭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에 이진무는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상관들인 이윤환(李允煥)·김석하(金錫河) 등과 상의해 그들을 응징코자 하였다. 이진무의 지시에 의해 함께 국민부 간부들이 있는 싱징현(興京縣)으로 갔다. 그러나 이 계획은 중국 관헌의 방해로 성사시키지 못하였다. 이같이 조직의 간부들과 뜻을 함께할 수 없게 되자 동지들과 1931년 2월 7일 노동자위군(勞動自衛軍)을 조직하였다. 대장에는 이진무가 추대되었고, 박인홍(朴仁弘)·황세일(黃世日)·최영걸(崔永杰)·이해산(李海山)·전광도(全廣道)·조국원(趙國元) 등과 함께 단원으로 참여하였다. 이 단체는 그 해 (음)4월 재만조선인혁명군(在滿朝鮮人革命軍)이라 개칭하고, 만주는 물론 국내로 진입해 일제 침략자 및 기관을 철저히 처단하고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1931년 10월 동지 이해산과 함께 대장 이진무를 따라 국내로 진입하였다. 같은 달 4일과 5일, 평북 구성군 노동면(盧洞面) 내양동(內陽洞)과 산서면(山西面) 신덕동(新德洞) 등을 다니며 군자금 모집 활동을 펼쳤다. 이후로도 평안도 지방을 종횡무진하며 무장활동을 펼쳤다. 재만조선인혁명군의 이 같은 활동에 평안도를 비롯한 압록강 일대가 크게 소란해지자 일제는 국경에 배치된 일제 경찰대에 삼엄한 경계령을 내렸다. 결국 일제 신의주경찰대와 안둥(安東) 경찰대의 합동추격을 받아 1932년 1월 10일부터 16일 사이에 대부분의 단원이 붙잡혔다. 이때 박인홍과 함께 먼저 붙잡혔다. 당시 『매일신보』는 먼저 붙잡힌 이 두 사람이 다른 동지들을 유인한 까닭에 모두 붙잡히게 것이라고 해 이들을 귀순자로 보도하였다. 그러나 1933년 6월 26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받고 옥중에서 두 번의 감형을 받기는 했으나 결국 징역 15년의 옥고를 겪은 것을 보면 틀린 보도로 추정된다. 1940년 12월 작성된 서대문형무소 수감카드에는 형기를 마치면 1949년이 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1940년 12월까지는 옥중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행적은 확인할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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