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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구

申鉉九

1882. 12. 8 ~ 1930. 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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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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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논산(論山)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논산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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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대한독립애국단
  • · 연통부

포상 정보

  • · 독립장(1968)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8) 1882년 12월 8일 충청남도 논산군(論山郡) 부적면(夫赤面) 안천리(顔川里)에서 신지균(申智均)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평범한 농가에서 성장하며 17세 무렵까지 고향 서당에서 한문을 익히다가, 공주 영명학교를 설립한 미국 선교사 윌리엄즈[우리암(禹利岩)]를 만나 공주 영명학교에서 신학문을 익혔다. 영명학교를 마친 뒤 공주 계룡에서 사립 원명학교를 세워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기독교 전도에 힘을 쏟았다. 20세 무렵인 1902~3년 모교인 영명학교의 한문 교사로 일했고, 이규갑 등과 교유하면서 민족의식을 키워 나갔다. 1908년 대한학회에 「탄애신불애국(歎愛身不愛國)」이라는 논문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1909년 정동교회의 미선교사 텔러의 한국어 교사로 지내면서 1년 남짓 서울 생활을 보냈으나,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낙향하였다. 공주에서 생계를 위해 서적상·재봉틀회사 사원으로 일하다가 1915년 서울로 올라와 이화학당 부속 여학교인 아현여학교·공덕리여학교 등에서 한문 교사를 지냈다. 이때 정규식(丁奎植)·안교일(安敎一) 등과 교류하면서 독립운동의 방도를 모색하던 중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기독교 인사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만세운동을 민족독립의 기회로 판단하고, 구체적 독립운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1919년 4월 대한독립애국단을 결성하고 단장을 맡았다. 이 단체는 전국 규모의 조직을 목표로 삼고 먼저 서울에 본부를 설치했는데, 초기 단원은 동생 신현창(申鉉彰)을 비롯하여 권인채(權仁采)·김순호(金順皓)·김영식(金永植) 등이었다. 신현창은 공주 영명학교를 거쳐 1918년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한 뒤 의사로 근무하고 있었으며, 권인채는 동향 출신의 후배로 공주 영명학교에서 같이 근무한 일이 있고, 연희전문에 재학 중이었다. 김순호는 중앙학교 학생이었다. 이들은 동지 규합과 함께 연고가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지단 설치에 힘을 기울였다. 서울에 본부를 둔 대한독립애국단은 전라도와 충청도, 강원도 등지로 조직을 확대해 갔다. 대한독립애국단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단체로 알려져 있지만, 결성 초기부터 임시정부 지원을 목적으로 삼았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자생적 독립운동단체로서, 독자 활동을 모색해 갔다. 그런데 독립운동 열기가 국내외로 확산되면서, 상하이(上海)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구심체로 부상하자 그에 따른 지원 활동을 행동 지침으로 삼아 나갔다. 이런 상황에서 동생 신현창을 상하이로 파견하여 임시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이루어 나갔다. 임시정부는 6월 말 안창호가 내무총장에 취임하면서 7월 초 임시정부 국내조직인 연통제 시행을 공포하고, 국내 기반을 획득하는데 전력을 기울여 갔다. 대한독립애국단의 지단 가운데 조직과 활동 면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활발했던 것은 강원도단이었다. 1920년 초 강원도단이 발각되면서 대한독립애국단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는데, 이때 언론지상에 ‘철원애국단’으로 보도되면서, 대한독립애국단은 철원애국단으로 더 잘 알려지게 되었다. 대한독립애국단의 주요 임무 가운데 하나는 연통부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연통제는 임시정부의 핵심적 조직으로서 “국민간에 기맥을 상통하고 복국사업의 완성을 기하여 내외활동의 일치”에 목적을 둔 것이었다. 연통제의 주요 활동은 임시정부의 선전·통신연락·자금 수합 등이었다. 연통제는 1919년 7월 10일 공포된 후 함경도·평안도·황해도 등 북부 지역에서는 활발히 전개되었으나, 강원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 등 중부와 남부 지역에서는 거의 실현되지 못하고 있었다. 연통제가 실시되지 못한 지역에서는 임시정부를 지원하던 대한독립애국단·대한민국청년외교단 등과 같은 단체들이 연통제 역할을 대행하고 있었다. 대한독립애국단의 임시정부 선전, 국내 정보 수집, 자금 모집 등의 활동은 연통제 활동과 다름없었다. 이를 통해 국내 비밀단체와 임시정부가 더욱 밀착되었으며, 동년 9월경 임시정부 통합으로 국민적 열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이들은 서울에 연통본부를 설치하는 수준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10월 초에는 연통본부 설치를 구체화시켜 갔다. 이때 윤종석(尹鍾錫)·송세호(宋世浩)·나창헌(羅昌憲)·전필순(全弼淳) 등 청년외교단과 대동단 인사들을 만나며 연통본부 설치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연통본부의 설치는 11월 의친왕 상하이 망명 계획이 탄로나 조선민족대동단 조직이 파괴당하면서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난 뒤 만세운동은 독립운동의 유력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국치일을 맞거나 임시정부 통합을 축하하는 시위를 비롯하여, 소위 시정기념일과 천장절을 기해 전국 각처에서 만세운동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대한독립애국단 역시 만세운동을 추진하였다. 강원도단에서 임시정부 통합 축하 시위, 서울 본부에서 소위 천장절을 기해 제2의 만세운동을 계획, 추진해갔다. 서울 본부의 시위는 조선민족대동단·대한민국청년외교단 등의 단체들과 연합하여 추진되었다. 이들은 1919년 만세운동과 같은 제2의 만세운동을 벌이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워나갔다. 여기에는 임시정부의 지원도 따랐다. 당초에는 천장절인 10월 31일을 기해 거행키로 했으나, “임시정부에서 전달된 대한독립선언서의 민족대표가 국외 인사들로 이루어져 만세시위의 효과를 떨어뜨릴 수 있다”고 하여 민족대표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부득이 연기되고 말았다. 조선민족대동단원 나창헌이 인선을 맡은 새로운 민족대표에는 국내 비밀결사의 주도 인사들이 중심을 이루었다. 그런데 학생·청년들의 동원 책임을 맡았던 민강(閔橿)과 강매(姜邁)의 행적이 일제 경찰에 탐지되면서 11월 1일 붙잡혔고, 11월 10일 결행한 의친왕의 상하이 망명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면서 조선민족대동단의 조직이 파괴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신변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대한독립애국단과 조선민족대동단의 인사들을 규합하면서 예정대로 만세시위를 추진시켜 나갔다. 11월 25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계획을 진행시키던 중 11월 20일 붙잡혔다. 붙잡힌 후에도 안교일·이신애(李信愛) 등이 만세시위를 주도하여 당초 보다는 훨씬 축소된 규모로 11월 28일 안국동에서 거행하였다. 이 일로 재판에 회부되어 1920년 12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5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여 1921년 3월 1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 신간회(新幹會)의 발기인으로 참가했으며, 경성지회 설립에 앞장섰다. 1927년 6월 10일 서울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설립한 경성지회는 신간회 지회 가운데 가장 규모도 크고 활동도 비중있는 지회였는데, 이때 서기를 맡았다. 이 무렵 잡지 『심경(心鏡)』에 항일사상을 고취하는 글을 실었다가 다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이때 징역 3년 6월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신간회 경성지회 관련 활동을 확인할 수 없고, 1930년 7월 13일에 사망한 것으로 보아 옥고를 치른 뒤 여독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장석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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