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모
申宰模1885. 4. 26 ~ 1958. 6. 15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
- · 대구노동친목계
- · 진우연맹. 대구노동공제회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대구진우연맹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85년 4월 26일 경상북도 칠곡군(漆谷郡) 북삼면(北三面) 율동(栗洞)에서 태어났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국본재모(國本宰模)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고쳤다. 1921년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 대구(大邱)지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2년 12월 초순 대구부 시장정(현 대구시 동산동)의 서문시장을 중심으로 총대 김광서(金光瑞) 등과 함께 금주단연회(禁酒斷煙會)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활동이 활발히 진행되지 않자 1923년 11월 김광서·최석학(崔錫鶴)·김상원(金相元)·오석동(吳鎬東) 등을 동참케 해 단연계(斷煙契)로 개칭하였다. 1923년 1월 말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가 제4회 총회를 통해 회명을 대구노동공제회(大邱勞動共濟會)로 바꾸고 회장제를 위원제로 변경하면서 농민운동에 중점을 두고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 7월 대구노동공제회의 직업별 노동단체 설립에 영향을 받아 김광서(金光瑞)·김학삼(金學三)·서병하(徐炳夏)·김성곤(金聖坤)·장춘옥(張春玉) 등과 함께 대구역을 기반으로 운수노동자친목계(運輸勞動者親睦契)를 조직하였다. 1924년 운수노동자친목계는 대구노동친목계로 변경되었다가, 1925년 7월에는 대구노동친목회로 다시 변경되었다. 대구노동친목회 창립총회에서 “운수노동자의 지위향상·생활안정·상호부조” 등을 목표로 내세웠다. 대구노동친목회의 조직은 집행위원제를 채택하였다. 그러나 무정부주의 비밀결사 ‘진우연맹(眞友聯盟)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노동친목회의 활동을 전개할 수 없게 되었다. 1925년 3월 대구노동공제회의 도움을 받으면서 대구를 둘러싸고 있는 달성군의 가창(嘉昌)·성서(城西)·옥포(玉浦)·화원(花園)·논공(論工)·해안(解顔)·월배(月背) 등 7개면에 소작인 조합이 결성되었다. 이를 통해 달성군의 각 면 소작인 조합이 지세불납과 지세반환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소작지를 빼앗긴 소작농들이 낙작인회(落作人會)를 조직하여 지주에 맞서고자 하였다. 이에 1925년 3월 대구노공공제회관에서 열린 낙작인회에서 가창면의 지이달(池二達)을 의장으로 선출하고, 경북도청과 달성군청과 교섭하여 사태를 해결하려는 대응책을 마련하였다. 대구노동공제회의 농민부 위원 자격으로 교섭위원을 맡았다. 다른 농민부 위원 한규석(韓圭錫)·김하정(金夏鼎), 성서소작조합장 김용섭(金容灄), 논공소작조합장 나재연(羅在淵), 가창소작조합장 지이달 등도 함께 교섭위원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사상단체 정오회(正午會)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7월 대구경찰서 고등과에서 대구 각 단체 대표 2명을 초대하여 ‘치안유지법 실시 의의와 향후 방침’을 설명할 때, 정운해(鄭雲海)와 함께 대구노동공제회를 대표해 참석하였다. 1925년 8월 경북 예천(醴泉)에서 ‘형평지사 습격 사건’이 발생하자 대구의 10여개 사회단체가 대책협의회를 구성하였다. 이때 대구노동공제회를 대표하여 참석하였고, 대책협회의회 석상에서 이상훈(李相薰)·윤우열(尹又烈)과 함께 임시의장을 맡아 진상 보고를 행하였다. 1925년 9월 29일 대구에서 서동성(徐東星)·방한상(方漢相)·서학이(徐學伊)·정명준(鄭命俊) 등과 함께 무정부주의 단체인 진우연맹(眞友聯盟)을 조직하였다. 이후 일본 무정부주의단체와의 연결을 위해 방한상이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東京)에서 자아사(自我社)를 설립하고 기관 잡지 『자아(自我)』를 발행하면서, 무정부주의 잡지 『반역(反逆)』에 관계하던 구리하라 가즈오(栗原一雄)를 알게 되었다. 일본인 구라모토(掠本運雄)와 재일본 한국인 김정근(金正根)과도 관계하였다. 박열(朴烈)이 사형될 경우 박열의 시신 인수와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의 입적(入籍)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박열의 형 박연식(朴延植)을 만나러 대구로 온 구리하라 가즈오를 만났다. 이때 구리하라를 통해 일본 무정부주의 조직 흑색청년연맹(黑色靑年聯盟)의 도쿄 긴자(銀座) 상점 파괴 등 활동 상황을 설명 듣고, 흑색청년연맹에 가맹하였다. 1926년 4월 자택에서 파괴단을 결성하였다. 이 자리에서 일본 흑색청년연맹의 투쟁을 본받기로 결의하였다. 이를 위해 한국인 부호에게서 자금을 모금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1926년 8월 15일을 기해 대구부에 있는 경상북도 도청·대구경찰서·대구지방법원 등 주요 지배기구와 각 은행·회사 등 주요 시설물을 폭파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아울러 경북 도지사를 비롯한 주요 관리를 한꺼번에 모두 암살하고, 주요 관공서가 밀집한 대구 원정통(元町通)을 폭파할 계획을 세웠다. 폭탄은 중국 상하이(上海)의 김판선을 통해 확보하기로 하였다. 1926년 5월 초에는 일본의 구리하라 가즈오를 초빙하여 파괴단 계획에 대해 자문을 요청하였다. 구리하라는 방한상과 함께 상경하여 평양(平壤) 출신 김원(金元)을 만나 상하이(上海)로부터 폭탄 반입 계획을 견실히 한 후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상하이에서 진행 중이던 극동무정부주의총연맹이 성립되면, 이에 가입하여 국제적 연대를 갖기로 하였다. 1926년 5월 김정근에게 반역아연맹(叛逆兒聯盟) 선언서 9장을 전달받아 진우연맹 구성원에게 배포하였다. 이를 계기로 진우연맹의 서학이·방한상·정명준 등과 함께 반역아연맹에 가입하였다. 한국의 진우연맹과 일본의 반역아연맹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며 활동하였다. 그러나 진우연맹원 안달득(安達得)이 일제 경찰에 검거되면서 진우연맹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1926년 6월 일제 경찰에 검거되어 경북경찰부와 대구경찰서의 합동 조사를 받고 난 뒤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1927년 3월 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미결구류일수 100일 본형산입)을 받고 불복하여 항소하였다. 1928년 5월 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항소 기각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복심법원 판결에서 법정미결구류일수 372일을 인정받아 1931년 1월 18일 방한상과 함께 대구형무소에서 풀려났다. 광복 후에는 독립노동당에 입당하여 독립노동당 전당대표대회에서 중앙감찰위원, 중앙감찰위원장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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