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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贊淑

贊淑

1891. 9. 9 ~ 1927.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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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柳贊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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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남해(南海)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남해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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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남해군 남해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1년 9월 9일 경상남도 남해군(南海郡) 설천면(雪川面) 문항리(文巷里)에서 태어났다. 남해군 남해면(南海面) 읍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남해군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0일 남해읍내 시위를 시작으로 고현면(古縣面), 설천면 등에서 그 해 4월 6일까지 최소 5차례 발생하였다. 그 가운데 4월 6일 전개된 고현면의 만세시위에서는 일제 경찰의 발포로 사상자까지 발생하였다. 4월 2일 거주지인 설천면 문항리에서 100여 명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같은 달 4일 남해면 읍내 시장에서의 만세시위에 참여하여, 정순조(鄭順祚)·정학순(鄭學淳)·정몽호(鄭夢虎)·윤주순(尹柱舜) 등과 함께 시위대를 이끌었다. 4월 2일부터 4월 4일까지 설천면·고현면·남해면 읍내 만세시위로 이어지는 거사의 시작은 설천면 문의리(文義里)에 사는 이예모(李禮模)가 인근 하동군(河東郡)에 가서 ‘대한독립선언서’를 받아온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 선언서는 3월 18일 하동군 읍내 만세시위를 위해 주도 인물들이 자체 제작한 것이었다. 이예모는 설천면에서 평소 뜻을 같이하던 인사들에게 가져온 선언서를 보여주며 거사를 제안하였고, 정순조·정학순 등과 함께 적극 참여하였다. 4월 4일 오후 2시 읍내 시장에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자, 정순조·정학순 등과 함께 맨 앞에서 시위대를 이끌었다. 주요 인사들이 독립선언서를 읽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만세를 외치자, 수백 명의 사람들이 호응하고 독립만세를 따라 부르며 읍내 시장을 순회하였다. 그리고 식민지배 억압의 상징인 읍내 경찰관 주재소로 가서, 만세운동으로 붙잡힌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내부로 들어가 기물과 집기 및 유리창 등을 파손하는 한편, 주재소 안의 경찰들을 압박해서 만세를 부르도록 하는데도 앞장섰다. 이어서 시위대를 이끌고 군청에 들어가서는 앞뜰을 가득 메운 군중 앞에서 군수에게 만세를 부르도록 하였다. 이후에도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식민지 수탈의 상징인 금융조합 사무실·우편국 등의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의분을 표현하고, 안에 있던 직원들을 둘러싸고 만세를 부르도록 하였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군중의 만세시위 열기는 더욱 뜨거워졌으나, 진압을 위해 사천(泗川)경찰서의 지원 병력이 도착하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증원된 일제 경찰들이 총검을 휘두르며 폭력적으로 강제 진압에 나서자, 시위대는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위대 해산에 성공한 일제 경찰들은 주도 인사들을 색출하여 검거하기 위한 작전을 시작하였다. 결국 20명이 넘는 사람들과 함께 붙잡혔고, 일제 경찰의 고문과 조사를 받은 후 이른바 소요죄와 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8월 7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만세시위로 치안을 방해하였고, 군청·주재소 등에 들어가 직원·경찰을 협박하고 만세를 강요한 것이 인정된다”고 하여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9월 2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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