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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點善

點善

1901. 11. 5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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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劉點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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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강화(江華)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강화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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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14)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14) 1901년 11월 5일 경기도 강화군(江華郡) 화개면(華盖面) 읍내리(邑內里, 현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에서 태어났다. 출생지에는 이설(異說)이 있는데, 「신문조서」는 출생지를 황해도 배천군(白川郡)으로 기록하고 있다. 일제 측 신문조서의 기록에 따르면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며, 만세운동 당시에는 선교사들의 지원을 받아 상경하여 서울 이화학당(梨花學堂)의 2학년생으로 재학하고 있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이후 탑골공원의 육각정을 시작으로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는데, 서울 내 학생들은 만세운동 계획 전파, 독립선언문 제작·배포 과정에서 주도적으로 활약하였고, 대열에 참가하여 만세를 외쳤다. 평소부터 일제로부터 한국이 독립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3월 1일의 만세운동을 목격한 이후 독립의 때가 왔다고 생각하였는데, 3월 5일에 재차 만세운동이 예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같은 이화학당 2학년생 신진심(申眞心) 등과 함께 참가를 결의하였다. 만세운동 당일인 3월 5일 오전 9시, 대한문으로 가서 이미 만세를 외치고 있던 군중에 합류한 다음, 함께 만세를 외치며 서울 시내를 행진하였는데, 이때 붉은 옷감을 흔들고 독립선언서를 살포하였다. 이후 강제 진압에 나선 일제 경찰에 의해 종로(鐘路)에서 붙잡혔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상태에서 형사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6월 20일 실시된 신문(訊問) 과정에서 운동 참가가 자발적인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며, 한국은 일제로부터 마땅히 독립해야 하고, 만세운동 참가는 정의로운 행동임을 조선총독부 판사 호리 나오요시(堀直喜)를 상대로 강론하였다.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의 1심에서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고 독립선언서를 살포한 행위에 대해 불온출판물을 취급하고 치안 혼란을 야기했다는 이유를 들어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집행유예로 풀려났으나, 붙잡힌 이후 일제에 의해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된 채로 재판 절차가 진행되었으므로, 옥고는 약 8개월에 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4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조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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