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仁秀
仁秀1886. 6. 19 ~ 1947. 12. 27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2)
관련 사건
- · 합천군 대병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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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2) 1886년 6월 19일 경상남도 합천군(陜川郡) 대병면(大幷面) 창리(倉里, 현 회양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20일 대병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합천지역 만세운동은 서울의 만세시위 소식과 함께 독립선언서가 전해지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대병면 만세시위는 창리 장날인 1919년 3월 20일 일어났다. 대병면 장단리(長湍里)의 정태섭(鄭泰燮)은 직접 서울에서 독립선언서 500장을 가지고 와서 합천군 전역에 배포하였고, 임상종(林尙鍾)도 고종 국상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하여 만세운동을 접하고 독립선언서를 몰래 숨겨서 왔다. 이기복(李起馥)은 서울에서 내려온 백산면(栢山面, 현 쌍백면) 친구 이언영(李愿永)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았다. 이들 외에도 권영두(權寧斗)·권중박(權重璞)·정시권(鄭時權)·권양희(權良熙)·송헌기(宋憲基) 등과 함께 창리 장날을 기하여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협의하였다. 함께 한 주도 인물들은 20여 명에 달하였다. 구체적인 준비 작업은 이들 20명과 함께 3월 18일 금곡리(金谷里)의 곽씨산정(郭氏山亭)에 모여 논의하였다. 이 모임에서 큰 태극기 및 작은 태극기의 제작, 각 마을별 군중 동원을 위한 연락 분담 등이 이루어졌으며, 이들과 함께 연락과 제작한 태극기의 배부에 역할을 분담하였다. 거사 당일인 3월 20일 각 마을 주민들은 미리 배부된 태극기를 지참하고 창리시장으로 모여들었다. 오후 1시 4일장인 고현(古縣)시장을 중심으로 대략 4,000명을 헤아릴 정도로 대규모였다. 만세시위는 권영두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주도자들과 함께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군중을 이끌고 시장을 일주하였다. 이어서 일본 경찰 주재소를 포위하고 내부로 진입하였다. 주재소 순사들이 총격을 가하자 이들에게 물리력을 행사하는 한편 건물을 파괴하고 집기와 문서류를 끄집어내어 소각하는데 앞장섰다. 이후 시위대를 이끌고 인근 면사무소로 달려가서 역시 건물과 집기를 파괴하고 서류 등을 밖으로 끄집어내어 소각하였다. 시위가 가열되자 일본 군경은 폭력적인 진압을 본격화하였다. 총검을 휘두르고 총격을 가하였다. 시위대가 흩어지자 주동자 검거를 본격화하였으며, 권영두·임상종·송헌기 등과 함께 붙잡혔다. 혹독한 경찰의 심문을 거친 후 재판에 넘겨졌다. 그리고 1919년 9월 15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10월 2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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