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良鎭
鎭1874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7)
관련 사건
- · 수안군 대천면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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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7) 황해도 수안군(遂安郡) 대천면(大千面) 수치리(秀峙里) 출신이다. 일제 측 자료에 따르면 1919년 당시 나이가 46세로 1874년생으로 추정된다. 천도교인으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3월 3일 수안군 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저녁, 황해도 곡산군(谷山郡) 곡산면(谷山面) 남천리(南川里)에 거주하는 이경섭(李景燮)이 수안군 수안면(遂安面) 석교리(石橋里)의 수안천도교구를 방문하였다. 방문 목적은 만세운동 발발 소식과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수안군 일대 만세시위를 독려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만세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추진한 천도교 중앙총부의 뜻을 전달한 월보과장(月報課長) 이종일(李鍾一)에 의해서 비롯되었다. 1919년 3월 2일 수안 천도교구의 교구장 안봉하(安鳳河)는 관내 천도교인들과 모임을 가졌다. 그 모임에는 김영만(金永滿)·나찬홍(羅燦洪)·이영철(李永喆)·홍석정(洪錫楨)·한청일(韓淸一)·이윤식(李潤植)·홍두익(洪斗益) 등이 참석하였다. 평소 독립을 염원하였던 이들은 다음날인 3월 3일에 수안군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하지만 수안헌병분대가 수안 천도교구실을 급습해서 독립선언서를 압수하고 현장에 있던 안봉하를 비롯한 천도교 인사들을 연행하였다. 만세운동의 지역적 확산 가능성을 차단하라는 황해도 경부부장의 전보에 따른 조치였다. 헌병의 연행을 피한 이영철·홍석정·한청일은 1919년 3월 3일에 수안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들은 수안군 내 천도교인들에게 만세시위 참여를 독려하였다. 3월 2일 오관옥(吳觀玉)의 권유를 받은 천도교 전도사 이동욱(李東郁)은 천도교인들에게 만세시위 참여를 독려하였다. 평소 독립을 염원하였던 바, 이동욱의 권유에 동의하고 3월 3일 수안군 독립만세운동의 참여를 결의하였다. 1919년 3월 3일 오후 12시에 수안헌병분대 앞에서 시위대와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헌병분대의 퇴거를 요구하였다. 이를 보건대 오전 11시에 수안 천도교구에서 이동욱과 오관옥이 주도하는 시위대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시위대가 헌병분대 진입을 시도하자, 일제 헌병은 발포하였다. 일제 헌병의 발포가 있자, 오후 1시에 홍석정·한청일·오관옥이 이끄는 150여 명의 시위대는 수안헌병분대로 갔다. 독립의 정당성을 외치면서 헌병분대의 퇴거를 요구하였다. 시위대가 헌병분대 정문을 통과해서 경내로 진입하자, 일제 헌병은 시위대를 향해 사격하였다. 시위대를 주도한 홍석정과 한청일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으며, 총상을 입은 오관옥 역시 사망하였다. 일제는 수안군 일대에 소대 및 중대 병력을 증파하였다. 동시에 수안군 만세시위에 참여한 인사들을 색출하고 붙잡아들였다. 그 과정에서 일제 군경에 의해서 연행된 후, 재판에 회부되었다. 1920년 3월 22일 수안군 만세시위 참여자를 내란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고등법원의 판결이 나오자 1920년 7월 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소요죄, 저택침입죄를 적용받았다. 같은 해 1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는 이른바 소요죄를 적용해서 징역 1년 3월(미결구류일수 중 450일 본형 산입)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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