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필
兪承弼1891. 4. 28 ~ 1974. 11. 24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의성군 안평면 일대(3.15~19)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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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1년 4월 28일 경상북도 의성군(義城郡) 안평면(安平面) 마전리(馬轉里) 출신이다. 안평면 대사동(大司洞, 현 대사리) 교회의 이북술(李北述)을 비롯한 기독교인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5일 대사동 교회에서 주일 낮 예배를 마친 김옥돈(金玉頓)과 교회 신자인 이북술·이종출(李鍾出)·이양준(李良俊) 등은 만세운동 거사를 제의하였다. 참석자들은 적극 찬동을 표하였고, 거사를 위해 주민들의 동의를 얻은 후 본격적으로 준비를 시작하였다. 이북술로부터 만세운동 계획의 소식을 접하고 정흥록(丁興錄)과 함께 그 자리에서 동참하기로 결정하였다. 다음날인 3월 16일 오후 8시 1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대사동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기도동(箕道洞, 현 기도리)을 거쳐 창길동(倉吉洞, 현 창길리)까지 시위 행진을 한 후 자진 해산하였다. 3일 후 3월 19일은 도리원(桃李院, 의성군 봉양면 화전리 인근) 장날이었다. 이 날을 이용하여 시위 군중을 대규모로 결집한 후, 의성경찰서를 공격하여 수감 중인 동지들을 탈환하려는 계획이 수립되었다. 이때 최초 운집한 400여 명과 시위과정에서 합세한 300여 명까지 700여 명의 시위대를 주도하여 안평주재소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후 안평면 박곡동(朴谷洞, 현 박곡리)·석탑동(石塔洞, 현 석탑리)·신월동(新月洞, 현 신월리)을 거쳐 거사 장소인 도리원 장터로 행진하였다. 한편 다른 시위대는 창길동에서 괴산동(槐山洞, 현 괴산리)·도옥동(都玉洞, 현 도옥리)·신안동(新安洞, 현 신안리) 등을 거쳐 봉양면(鳳陽面) 사부동(沙阜洞, 현 사부리)까지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두 무리의 시위대는 도리원 장터에서 합류하여 시위 행렬은 수천 명을 헤아리는 규모로 확대되었다. 시위 행렬이 ‘흰재’ 마루에 이르렀을 때 첩보를 입수한 의성경찰서는 한국인 경부 1명, 순사 2명, 헌병 상등병을 도리원 주재소로 급파한 후 대구(大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80연대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삼엄한 경계 태세를 펼치며 시장을 폐쇄한 일본 군경은 시위대의 행진을 봉쇄한 후, 대대적인 검거 작전을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조치는 수천 명의 시위대가 몽둥이로 무장한 채 도리원주재소로 진격한 후 돌을 던져 건물을 파괴하는 격렬한 항일투쟁을 초래하였다. 이에 일본 군경은 무차별 총격으로 대응하여 시위대에서 권해운(權海雲)이 현장에서 사망하였고, 10여 명이 총상을 당하는 등의 피해를 입었다. 결국 시위 군중은 강제 해산되고 시위 주도자는 현장에서 붙잡혔다. 이 때 왼쪽 눈가에 총상을 입은 후 붙잡혔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1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6월 1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면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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